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81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7 - 50 (4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거창 출신의 항일 운동가인 尹忠夏[1855~1925]는 郭鍾錫이 파리장서 운동에 나서도록 설득하였고 을사오적 암살단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해배되자마자 무장 항쟁을 하기 위해 충청도 홍성에 있던 勉庵 崔益鉉[1833~1906]의 의병 군진을 직접 찾아가 최익현으로부터 ‘진정한 영남의 義士’라고 극찬을 받은 인물로 자신의 역사의식을 문학 작품으로 창작하였다. 「擬弔義帝討項籍文」은 일본에 나라를 판 五賊이나 고종을 핍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매국 분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창작하였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金宗直의 「弔義帝文」이 무오사화의 도화선이 될 정도로 심각한 작품이었듯이 「擬弔義帝討項籍文」 역시 단순히 군신 간의 의리를 강조하는 글에 그치지 않는 현실성을 지닌다. 「擬太公與伯夷書」는 太公이 백이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인데, 민심이 이반되어 멸망한 수밖에 없는 왕조에 절의를 고집하는 맹목적 충성의 무모함을 비판하는 역사의식이 드러나 있다. 윤충하는 경술국치 당시의 심정을 피력한 「無題」나 고종의 서거에 항의하여 자결한 尹鳳儀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쓴 「挽族叔 鳳儀」, 사회적 윤리와 가치가 파괴된 시대상을 비판한 「傷時 七絶 竝引」 등에서 특유의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傷時 七絶 竝引」의 첫 번째 수에서는 기독교의 폐해를, 두 번째 수에서는 祖國思想이 없는 것을 비판하였다. 세 번째 수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 수까지는 五倫과 관련된 내용이다. ‘父子相殘’은 ‘父子有親’에, ‘無君論者’는 ‘君臣有義’에, ‘離婚男女’는 ‘夫婦有別’에 ‘兄弟相爭’은 ‘長幼有序’에, ‘無朋友道’는 ‘朋友有信’에 대응된다. 그러나 종래의 五倫論이 현실적으로 구체화․예각화 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윤충하는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와 국권 상실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대한 의식을 노래하였다. 그는 자신의 곤궁한 삶을 좋은 문학적 소재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 곤궁한 삶의 문학화는 그러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확신케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신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기 때문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였지만, 그러한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窮居戱題」와 같이 농기 어린 문학 작품으로 표현할 여유가 있었다. 그가 삶의 고단함으로 노래한 것 중 하나는 ‘나그네살이’이니, 「思鄕」 등에서 신념의 실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을 토로하고 있다. 「華山雜詠」 등에서는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하는 불우한 심경을 노래하였고 「書憤」과 「老儒行」 등에서는 생에 대한 회한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한편, 「苦寒」과 「立春」 등에서는 암울한 세상은 반드시 지나가고야 만다는 희망과 틀림없는 자연의 이치처럼 역사의 필연적 이치도 구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윤충하의 항일 운동과 그의 문학이 갖는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그의 항일 운동은 고립 분산적이거나 소모적이지 않다2.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무장 투쟁의 신념을 지녔다. 3. 문필을 이용해 투쟁을 하였다. 4. 항일 독립 운동가의 문학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