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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이화어문학회 이화어문논집 이화어문논집 제49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30 - 53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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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희생된 단종과 관련 신하들이 복권되고 그 후손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진짜 혈육 찾기의 분쟁인 ‘광노자 사건’이 당시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요인을 논의한 것이다. 계유정난 당시에는 신하 당사자뿐만 아니라 처첩과 자녀들도 처벌대상에 포함되었으므로 가족들은 죽거나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몇백 년이 흐른 뒤 충절신이 복권될 때 이들의 진짜 후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단종대에 우의정이었고 계유정난 때 낙안(樂安, 현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정분(鄭苯)도 그런 예였다. 1746년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복권된 정분의 경우, 조정에서 그의 후손을 찾고 있을 때 자신들이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사람들이 연기(燕岐, 충청도 연기군)에 거주하던 정씨(鄭氏)와 진주(晉州)에 거주하던 정씨였다. 처음에는 이 두 집안 간의 다툼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장흥에 살고 있던 정씨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장흥 부사 황인영과 대사헌 조엄의 지지 아래 장흥 정씨들은 무덤을 열어 발견한 ‘광노자(狂奴子)’ 정원(鄭遠)의 묘지명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가 명망가들에게 관련된 글을 청했다. 원래라면 특정 집안 사이의 갈등으로 남았을 이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단종 및 관련 신하들을 복권하며 충절을 강조하던 분위기와 함께 장흥 정씨가 지석을 발견해서 자신들이 정분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극적인 스토리, 단편적으로 존재하던 여러 정황들이 아귀를 맞아가는 과정, 여러 우연들을 하늘의 뜻이라는 필연으로 연결시키는 문장의 논리, 불우했던 것들이 뜻밖의 상황을 맞아 행복하게 되는 결말에 사람들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장흥의 정씨는 다른 정씨들보다 현실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고 조정에서의 공인(公認)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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