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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주희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효원사학회 역사와 세계 역사와 세계 제57집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101 - 144 (44page)
DOI
10.17857/hw.2020.6.5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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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1363~1452)는 여말 선초의 격변기에 국가의 동량으로서 4대 임금을 모셨던 인물이다. 그러한 그의 청렴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본 논문은 황희에게 만일 공직자 윤리에 부정적인 면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그를 심복처럼 의지한 이유를 살폈다. 즉 재상인 그가 이끌어간 세종대의 시대적 상황을 살피고 재상으로서 황희가 국방 분야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세종대는 국제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세종은 백성을 살폈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황희가 필요했다. 北狄(몽골)이 언제 조선을 침공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축성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했지만 그것 때문에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황희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국방책을 입안하고 밀고나갔다.
1428년 황희는 현실에 맞추어 북방의 방어체계를 개선했고, 1432년부터 4군 6진 개척을 배후에서 지휘했다. 그러한 가운데도 황희는 많은 추문에 휘말렸고, 세종은 거듭 황희를 보호했다. 청렴한 국정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北狄(몽골)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려운 시기였기에 세종에게 황희의 혐의는 더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황희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도 난국을 타개하고 해쳐나갈 인물을 내친다는 것은 어려웠다. 세종에게 청렴하기만 하고 능력이 없는 인물은 필요가 없었다. 어느 특정 인물이 유학적인 소양이 높더라도 냉혹한 현실을 다루는데 서툴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오히려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야수와 날카로운 시선과 바위와 같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세종은 황희의 아들들이 자기 자식들의 물건을 훔쳐 나누어 가진 이 사건을 보고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그것은 존엄에 위해를 가하는 대역죄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적당한 선에서 봉합했다. 戰雲이 감도는 시기에 세종에게 황희는 없어서는 안 되는 漢元帝때의 ‘史丹’과 같은 존재였으며 충직한 명재상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Ⅰ. 『?村黃喜先生文集』을 통한 황희의 청백리 논란 검토
Ⅱ. 達達과 瓦刺의 발호와 세종의 고민
Ⅲ. 황희의 北方방어 체제의 개선과 보강
Ⅳ. 土木의 辯과 세종의 사망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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