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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인규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저널정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불교학보 제91집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121 - 143 (23page)
DOI
10.18587/bh.2020.6.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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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동안 환암에 관련해 아직 미흡하거나 논란이 있는 사실에 대하여 검토하면서 환암의 주요 생애와 불교계 활동에 대하여 고찰한 연구이다. 그간 환암에 대한 논고는 나름대로 진척되고 있지만 실증적인 문제가 남아 있으며, 불교사의 흐름에서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정밀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본고는 환암의 불교계 활동 가운데 스승 계송과 식영 연감, 승과인 공부선 응시, 환암이 머물렀던 궁궐의 내원당, 광암사와 송광사, 국사 책봉과 고려말 불교계 활동 등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환암의 스승인 계송이나 식영은 강화도 선원사에 머물렀으므로 환암도 수선사계통의 사굴산문계로 간주하고자 하였다. 환암은 오대산에서 머물면서 나옹과 교유하였으며, 믿음의 표식을 받았다. 그 후 나옹이 주도한 공부선에 응시하여 유일하게 합격하여 불교계에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옹에게 다시 한번 인증받았다. 그 후 환암은 나옹이 왕사로 책봉되어 머물렀던 송광사 주지에 재임하였으나 나옹과 무학이 인도의 승려 지공의 유지를 받들어 회암사의 중창불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환암은 아마도 그들과 다른 뜻을 가지고 불교계의 흥성을 위해 노력하였던 듯하다. 환암은 1374년 무렵 궁궐의 내원당에 들어가 재임하면서 공민왕과 대비에게 불법을 가르치는 등 왕실불교를 주도하였다. 환암은 회암사 주지직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378년(우왕 4)에 공민왕과 비의 원찰인 광암사에서 3년간 머물면서 『나옹화상어록』을 교정하였다.
나옹 입적 후 무학 등이 나옹의 추념사업을 전개하였으나 환암은 역시 동참하지 않았다. 환암은 1383년(우왕 9) 왕사를 거치지 않고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충주 청룡사 등에 머물면서 『호법론』 등 불서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환암은 무학 등과는 달리 왕실 불교의 중흥과 불서 간행사업을 통해 불교계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391년(공양왕 1) 공양왕이 즉위하자 환암은 국사로 다시 책봉되었으나,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조선 건국 직전 이성계와 함께 『대장경』 간행불사에 참여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축하의 글을 올렸다. 조선 건국 직후 무학이 왕사로 책봉되었지만 환암은 국사로 재임하다가 2개월 만에 입적하였다. 이렇듯 환암은 고려말 조선 건국초 국사로 재임하면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녔던 것이다.

목차

〈한글요약〉
1. 들어가는 말
2. 스승과 공부선
3. 사찰 주지와 국사 책봉
4. 나가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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