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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69 - 85 (1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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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성리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의 학맥을 이으면서도 실천적 학문을 추구한 인물이다. 특히 전환기의 조선 중기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수는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광정(匡正)하기 위해서는 ‘고문학(古文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중국의 신성한 권위를 지녔으며 지치(至治)를 펼쳤던 ‘삼대(三代)’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이상향으로 여겼다. 이처럼 고문에 주목하고 다시 복귀하려고 노력한 것은, 바로 문자에 함축되어 있는 ‘정신미’ 때문이다. 따라서 미수는 철저한 ‘상고주의자’였으며, 평생에 걸쳐 전심전력으로 몰두했던 학문은 ‘고문학’이었다. 미수의 고문학은 곧 ‘육경학(六經學)’이기도 하다. 그는 󰡔육경󰡕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 받아 표준을 세우고 만물의 도리를 이해하여 사업을 성취시켜 주는 글로서 천지의 지극한 가르침이며, 바로 성인의 도가 실려 있는 요체로 생각하고 매우 중시하였다. 미수는 당시 문인들이 ‘정주(程朱)’의 주석에만 매달리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정주’의 해석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육경󰡕고문을 이해하여 원시유학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미수가 선진(先秦)의 고문만을 중시할 뿐, 한ㆍ당 이후의 문자에 관하여는 거의 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문에 대하여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미수에게, 한ㆍ당 시대 이후의 문자는 자연미와 창고(蒼古)한 아취(雅趣)가 사라져버린 비속한 문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미수의 ‘상고정신’을 기반으로 한 고문인식은,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빠져있었던 당시의 학계와 예술계는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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