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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홍민기 (일본 간세이가쿠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307 - 34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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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일본의 감리교회, 그 가운데에서도 일본 남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조선선교 착수와 관련하여 그 개시과정 및 성격을 파악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다. 19세기말, 조선은 외세의 압력에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조선은 부산․원산․인천 등 세 곳의 항구를 개방하여 외국인거류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으로 이주하과 정착하는 일본인들은 매년 증가했다. 이주자들 가운데에는 일본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교회 입장에서는 재한일본인들이 신앙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때로는 재한일본인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일본교회 측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기도 했다. 시대적 상황을 인지한 일본 남감리회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일본 남감리회의 대표적 토착지도자였던 스나모토 데이키치는 1903년 연회에서 조선여행담을 언급하며 이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이어 일본교회에서는 조선을 방문하며 사전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 남감리회 측은 재한일본인 선교 착수를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교회 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약 1년간 선교사업 추진이 지체되기도 했다. 마침내 일본인 전도자 구도 시게루가 1907년 가을에서 1908년 봄 사이 원산에 파송되면서 일본 남감리회의 조선선교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 남감리회의 조선선교 착수는 일제의 조선진출과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일찍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조선침략을 준비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이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조선이주와 정착은 매년 증가했다. 특히 조선침략의 발판을 확고히 했던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이주자들의 수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회는 1905년 조선 내 자국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거류민단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통감부는 시행규칙을 발포하며 시행시켰다. 일본 당국이 자국민 관리를 조선침략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일본 남감리회의 조선선교 착수는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동기부여와 사전작업
Ⅲ. 원산선교 개시
Ⅳ. 부산에서 원산으로 변경된 이유
Ⅴ. 원산선교의 특징
Ⅳ.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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