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44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11 - 244 (3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箕子는 중국 上古時代 商나라의 賢人으로서 商이 周에게 멸망하자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기자를 始祖神으로 숭배하였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유교적 敎化君主로 인식하고 국가적 치제의 대상으로 하였다. 16세기 후반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기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더욱 깊어져서 기자는 조선에 와서 洪範九疇의 구체적 실천을 이룬 왕도정치의 구현자로서 孔·孟·程·朱에 비견되는 조선의 성현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에 기자상이 처음 전래된 것은 1600년(선조 33) 徐渻이 중국에서 元代의 趙孟頫가 그렸다고 하는 <기자진홍범도>를 구득해 오면서였다. 이는 商·周 교체기 周武王이 商을 멸망시킨 후 紂王에 의해 옥에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시켜주고 무왕이 직접 찾아가 天道의 彛倫을 물었더니 기자가 왕에게 洪範九疇를 설명해주었다는 기자 행적 중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기자진홍범도>는 평양의 仁賢書院에 보관되었으며, 기존에 기자의 畵像이 全無했기 때문에 조선에 알려진 최초의 기자 유상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1626년(인조 4) 예조판서 李廷龜가 화사 李信欽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임모하도록 한 일을 비롯하여 수많은 모사본이 제작되었고, 이후 수백 년간 문사들의 글 속에 인현서원의 기자화상을 배알한 감회를 읽을 수 있다. 서성이 구입해 온 <기자진홍범도>가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19세기의 모사본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말기 선전관을 지낸 韓應儉은 1807년 평양 인현서원에서 이 그림을 손수 모사하였다. 한응검의 <진홍범도>에는 초옥이 크게 배치되었고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초옥 안에 기자와 무왕이 마주 앉았고, 마루 아래에 史官이 홍범의 내용을 받아 적고 있다. 마당에는 召公과 太公이 공수 자세로 서 있다. 기자는 상나라 冠制인 冔冠에 백색 深衣를 걸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림의 도상은 조선시대 문사들의 기록에 묘사된 그림의 도상 특징과 일치하고 있어, 畵者가 충실히 원래의 그림을 모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 중의 箕子像이 󰡔箕子志󰡕 卷首에 수록된 <箕子像> 판화의 저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는 점이다. 󰡔기자지󰡕는 윤두수가 1580년 편찬한 책이지만 이후 李珥의 「箕子實記」와 韓百謙, 柳根, 許筬 등의 관련 글을 함께 엮어 재편되었고, 이 재편본 󰡔기자지󰡕가 조선시대 기자와 관련된 자료집 및 해설서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윤두수 편 󰡔箕子志󰡕(奎4929)가 가장 오랜 현존본으로 광해군 연간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자상> 판화는 󰡔기자지󰡕가 새롭게 재편될 때 포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자상> 판화와 함께 수록된 기자 행적도 판화는 󰡔抗議新編󰡕 수록 판화(1613-1615년 제작)와 󰡔東國新續三綱行實圖󰡕 판화(1612-1616 제작) 등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17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자지󰡕의 <기자상>은 이후 공인된 기자상으로서 조선에서 판각되거나 육필로 그려진 수많은 기자 유상의 저본이 되었다. 기자의 초상은 중국 元·明시대에 간행된 聖賢·君臣의 초상화집 판본에는 포함된 예가 없어 기자유상의 도상은 오히려 조선에서 먼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대의 󰡔古聖賢像傳略󰡕(1830년 刊)에서 비로소 <기자상>이 등장하지만 이는 조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기자 숭봉은 확대 일로였고, 아울러 기자유상의 제작도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진홍범도> 모본을 봉안한 箕子影殿이 인현서원 외에 두 곳에 더 건립되었고, 이 외에도 새로운 기자영전의 건립을 희망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평양의 인현서원에는 <기자진홍범도> 외에 당내 벽에 걸린 기자 영정도 있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자화상으로는 윤두서가 1706년에 그린 《五聖圖》 중의 <기자상>과 윤두서 필 성현·군신도상 화첩인《照史》 중의 <기자상>이 있다. 이 밖에 성현·군신도상 또한 윤완식 소장 《역대군신도상첩》은 수묵으로 그린 중국과 조선의 역대 성현·군신도상 화첩으로 <기자상>을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성립 전후시기에 기자숭배가 절정에 달하였는데, 조선말기의 유학자 鄭胤永은 일찍이 箕子의 ‘眞像’을 배알하고 감회가 일어 1874년에 기자상을 손수 베꼈으며, 이를 《箕子畵象帖》으로 꾸몄다. 또다른 군신도상첩으로 중국과 조선의 성현·군신 222인의 초상화를 엮은 개인소장의 《역대군신도상첩》에는 기자의 반신상과 전신상 두 폭이나 포함되어 있어 기자에 대한 존숭의 뜻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채용신은 1908-1909년에 정읍 영양사에 봉안할 열두성현의 화상을 그리면서 <기자상>을 제작하였다. 충북 증평에 소재한 箕子影殿인 箕聖殿에는 1914년 함흥의 지방 화사인 金貳參이 모사한 <기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기자 유상은 모두 동일한 도상으로 한결같이 󰡔箕子志󰡕 의 <기자상> 판화를 저본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중국 청대에 간행된 󰡔古聖賢像傳略󰡕과 같은 판본에 판이한 도상의 기자상이 등장하였음에도 영향 받지 않고 조선의 기자 유상은 동일한 도상을 독자적으로 꾸준히 계승·전승해 왔음을 볼 수 있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4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