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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4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43 - 17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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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변혁기로서 조선시대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 연구에서는 17세기인조~숙종 연간의 도화서 실상은 어떠했으며, 전후의 복구 상황은 어떠했는지, 도화서와 관련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왕조실록 과 승정원일기 두 官撰 자료를 토대로 하여알아보았다. 인조 연간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연이은 전란으로, 효종 연간에는 북벌 계획을 위한 군비 조달, 그리고 현종 연간에는 잇따른 대기근과 전염병의 창궐로 피폐한 상황이계속되어 도화서와 화원에 대한 관심이나 장려책은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서화를 애호한 인조의 경우 치세 기간 내내 李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나, 도화서와 서화부문 전반에 대한지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는 중국으로의 使行 일행에서 화원이 제외된다든지, 해마다 있었던 歲畵의 제작도 폐지되는 등 긴축 재정의 여파가 서화부문에 우선적으로미쳤음을 볼 수 있다. 도화서의 피폐한 사정은 개선되지 못한 채 숙종조까지 이어졌던 것으로보인다. 숙종은 서화를 애호하여 도화서와 화원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컸고 또 적극 장려하였다. 숙종 연간에 도화서 및 화원에 관련된 기록은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증가하였으며, 다양한 서화 장려 조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도화서 부지를 자신의 누이인 명안공주에게 절수해 주어, 도화서의 화원들이 청사를 빼앗기고 수십년 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한 것도 숙종이었다. 도화서의 원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견평방(종로구관훈동 일대)으로 그 곳에 800칸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곳이 명안공주방에 절수된 후 도화서는 예빈시와 통례원의 옛터, 충익부의 옛 터, 태평관 옛터 등의 장소를 획급받았고, 경신대출척(1680)과 기사환국(1689) 등을 거치며 죄인으로 몰린 집안의 가옥도 절수받았다. 그러나그 공간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위치가 궁벽하기도 하여 제대로 자리 잡지를 못하였다. 1713년 무렵에는 梨峴(종로 4가), 돈의문 안, 동구 안에 있는 예조 직방에 거처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18세기 중엽 제작의 《輿地圖》(1744-1753년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중의 <도성도>를보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남쪽과 태평방 소광통교 인근의 두 군데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록에서 살펴 본 도화서 移設 과정 이후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고종 때의 기록인 동국여지비고 에 도화서의 위치가 태평방이라 명시된 점을 보면 이후 태평방 소광통교인근의 도화서 청사로 작업 공간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야로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했던 도화서 화원들 가운데 호구책이 없었던 이들이 반을 차지하였으니, 그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숙종의 서화 장려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화원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보면 우선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체아직의 확보가 가장 시급하였다. 1682년에 녹을 받지 못하는 10명의 화원을 위해 녹체아직 다섯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689년에는 화원 3인의 요임이 가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92년에는 허의순과 같이 체아직의 임기를 마치고 동반직까지 지낸 우수한 화원들을 다시영입하기 위하여 司果 녹체아직을 가설하였으며, 이후 허태석을 위해서도 또 하나의 사과 녹체아직이 신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종 때 폐지되었다가 숙종 2년(1676)에 복구되었으나1686년에 다시 폐지되었던 歲畵의 복구를 임금께 직접 호소하여 1689년에 이루었다. 해마다 正初에 궁궐에서 쓰인 벽사를 위한 각종 기물과 그림의 제작은 별도의 代價가 지급되었기 때문에화원들에게는 요긴한 수입원이었다. 아울러 1690년 도화서의 잡일을 맡아줄 노비의 확보를 이루어 작업 조건도 다소 개선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숙종 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처우 개선책으로 말미암아 도화서 화원들의 사기는 진작되었고, 체아직의 신설로 도화서를 떠났던 우수한 화원들이 다시 영입되어 후배 화원들의 試取와 교육을 담당하게 됨으로서 화원들의 기량이 증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도화서와 화원에 대한 관심과 장려는 영조, 정조 연간에도 이어져 지속적인 화원 양성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조선후기 회화 발달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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