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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문학치료학회 문학치료연구 문학치료연구 제48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305 - 33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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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두 왕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연산군은 적장자 프리미엄 속에서 왕위에 올랐고, 광해군은 후궁의 두 번 째 아들이라는 한계 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라는 정치적 변수 속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이 된 후 독재 군주로 가는 과정 또한 달랐다. 연산군은 왕권이 신권에 휘둘리는 상황을 참지 못했고, 능상(凌上)에 대해 강한 피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추종하는 소수 측근 세력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을 반대파로 만들어 갔다. 광해군은 왕위 계승의 적통에 있던 이복동생 영창대군에 대한 지나친 견제와 이어지는 살해, 그리고 왕통에 대한 집착으로 시작된 교하 천도와 무리한 궁궐 조성 사업이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대북의 소수 측근 세력만이 광해군 정권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는 친인척 일부와 임사홍 등 일부 측근 세력만이 연산군의 독재에 추종했다는 점과 공통점을 보인다. 장녹수, 전비 등 기생 출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부여한 점은 광해군이 말년에 상궁 김개시에게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한 점과 유사하다. 유배된 후 두 왕의 모습은 큰 차이를 보였다.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후 불과 2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지만, 광해군은 가족들의 자결과 같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유배 후 18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았다.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과 최후의 장면에서는 오늘날 정치사와 오버랩 되는 정면들이 많다. 역사가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들을 역사 속에서 거듭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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