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9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77 - 112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대구는 한국전쟁기에 점령과 수복의 과정이 없어 좌우세력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고, 일부 진보세력도 잔존할 수 있었다. 여기에 패전 직전까지 내몰린 이승만 대통령의 무능력, 권력 연장을 위해 법을 유린하며 일으킨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지역 언론의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적인 성향 등이 더하여 시민의 반독재 정서와 정권 교체의 열망이 높은 지역이었다. 시민의 기대는 1952년 대통령선거와 195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 후보 지지로 표출되었고,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조봉암과 장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혁신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대구지역의 혁신적인 인물은 진보당 결성 추진의 한 축이었던 서상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러나 진보당 결성을 앞두고 서상일이 이탈하면서 혁신세력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으로 분열하였다. 혁신세력의 분열은 정치노선의 차이보다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일인의 향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분열 속에서도 혁신세력은 진보적 정치이념과 지향을 확산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두 정당은 역량의 분산과 정권 교체를 열망한 시민의 기대를 외면하여 지지 기반을 확장하기는커녕 축소되었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진보당이 해산되어 혁신세력의 중심이 무너졌고, 민주혁신당은 선거에서 참패하여 존재 의미조차 알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 이후 혁신세력은 와해되어 1960년 4월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하였다. 1950년대 혁신세력의 활동은 4월 혁명기에 대구지역이 진보적 사회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도시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19)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