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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硏究 슬라브硏究 제33권 제3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 - 2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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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니콜라이 1세 통치 말기 7여 년(1848-1855)의 검열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에는 검열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황제 자신의 적극적인 관여 속에 결정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국의 최고 검열관이자 ‘검열관들의 검열관’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검열테러시대’로 지칭될 만큼 엄혹한 검열체제가 확립되었다. 검열체제의 강화는 1840년대 말 유럽에서 발생한 혁명적 사건들에서 기인한 것으로 비상검열위원회의 설립과 검열관의 자질 향상이라는 두 가지 경향 속에 이루어졌다. 통상적인 공식 검열과는 별개로 그 어떤 법률의 틀에도 제한받지 않는 비공개적이고 비공식적인 검열이 언론출판을 억압했다. 특히, 1848년 4월 2일 설립된 부투를린위원회는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는 1855년까지 검열체제 강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상검열위원회의 등장은 기존의 사전검열제와 ‘검열에 대한 검열’의 사후징벌적 검열제가 병행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교육부 관할의 검열을 통과한 저작도 비상검열위원회의 검열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검열에 대한 검열’은 언론출판계 뿐만 아니라 기존 검열체제 안의 검열관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검열의 기준은 더욱 강화되었다. 니콜라이 1세가 의도한 이러한 검열의 순환구조는 자유로운 정보유통을 제한함으로써 사회 제 관계에서 러시아의 낙후성이 지속되게 만들었으며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것은 결국 크림전쟁에서의 패배와 니콜라이 1세 사망을 계기로 러시아를 대개혁의 노정에 서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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