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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92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13 - 360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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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을 기해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중공은 소련군을 돕고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화북과 만주로 병력을 급파하여 군사적 입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런 중공군의 군사 활동은 얄타 협정과 일반명령 제1호에서 보장한 국민당 정부의 역할 규정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장제스는 중공군을 제지하고자 하였다. 중공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편, 장제스는 1945년 8월 29일에 마오쩌둥과 함께 전후 국정 운영을 논의하고자 충칭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국공 양 측은 건국 방침 및 당파의 합법적 평등 인정에 대해 공감을 표했으나, 군대 조직 문제에서 상당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국공 양 측은 일본군 무장 해제 및 군사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무력충돌을 벌임으로써 심각한 분열양상을 일으켰다. 전후 중국에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방지하려 했던 미국은 국공 양 측의 분열과 내전을 막고, 전후 안정을 지원하기 위해 해병 제3상륙군단을 중국 북부 지역에 파병하였다. 이를 통해 미국은 화북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전후 안정화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내전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민당과의 대립에서 군사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중공에게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은 전략적 차원에서 장벽으로 작용하였으며, 적대적 인식을 심게 하였다. 미 제3상륙군단이 상륙한 1945년부터 주요 전력이 귀국하는 1947년까지 중공군은 미 해병대를 압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란 공세를 펼쳤으나, 미 해병대는 거점 방어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는 미국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 공세를 개시하였으며, 중공군은 만주에 고립되는 전략적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동 시기에 북한은 만주에 고립된 중공군에 대해 군사적 원조를 지원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공군은 재정비의 시기를 거쳐, 총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국공 내전이 끝나가는 1949년 중반에, 중공은 조선족 부대 2개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시켜 북한군 전력 증강에 협조함으로써 상호 군사 원조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남한에 대한 ‘무력해방’의 전략기조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이런 군사적 관점에서 국공 내전기의 미 해병대와 중공군의 대립, 그리고 북한의 군사 원조는 국공내전이 6・25 전쟁의 ‘전초전’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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