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87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 - 34 (3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中古期에 화랑도는 원화에서 보듯이 토착종교적인 집단으로 시작하여 戰歿將兵을 추모하기 위한 八關會의 의례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통일전쟁 중에는 斯多含과 官昌과 같이 개인적으로 종군하여 군공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金庾信의 경우 화랑도 시절에 中岳 석굴에 들어가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불교와 유교 및 도교를 배우고 익히는 風流道를 이미 相磨以道義하였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전쟁이 끝나고 난 뒤 화랑도는 교육적 성격과 인재 등용의 성격이 강해지며, 향가를 짓고 향가의 칭송을 받는 대상이 되어 相悅以歌樂하는 풍류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국선 夫禮郞이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가 靺鞨賊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왔는데 끝까지 쫒아간 安常은 大統으로 임명하고 그대로 돌아온 낭도들에 대한 포상이 없는 것을 볼 때, 遊娛山水하며 사람됨을 보아 관리로 천거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낭도인 得烏谷은 화랑인 竹旨郞을 위하여 慕竹旨郞歌를 지었으며, 忠談師는 讚耆婆郞歌를 지어 향가가 화랑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또한 화랑이 직접 향가를 지었다는 것을 파악하여 相悅以歌樂하는 風流道의 전통을 확인하였다. 신라 下代에는 군사적 실력에 의해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화랑도는 정치적 세력화하여 景文王의 예와 같이 왕을 직접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範敎師의 경우을 보면 相磨以道義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았다.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모두 포함한 玄妙之道의 風流道를 개념화함으로써 쇠퇴해지는 상황에서 최치원은 鸞郞碑의 서문을 통하여 풍류도의 진정한 부활을 바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은 「鄕樂雜詠」 5首를 남겨 鸞郞과 그의 낭도들이 직접 연희를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어 화랑도의 변화상의 일단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화랑도와 풍류도의 전통은 지속되었으나 놀이적 기능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는 ‘풍류도가 아니라 ‘풍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