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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29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9 - 76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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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노사학파가 19세기 후반 영남 서부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문인 정재규의 역할을 분석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은 1840년대부터 서학을 배척하고 의리와 도덕의 확산을 꾀하였던 산림학자로서 중앙정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영남의 노론학자들로부터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들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의 일족이나 문인들도 세도정치기와 대원군 집권기에 점차 중앙정계와 향촌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래 영남 서부지역에서 당색의 대립이 약화되고 다른 당파나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영남 서부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물들이었으며, 새롭게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려는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관과 협조하여 향약 실시나 󰡔소학󰡕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강학활동에 힘써 영남 서부 지역에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정여창과 조식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이들을 모신 서원이나 사우의 향례에 참여하거나 강회를 자주 개최하여 진주와 하동․산청․합천․의령 일대의 영남지역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넓혀 나갔다. 이러한 영남지역에서의 노사학파의 성장은 특히 정재규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정재규는 기정진 사후 적극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동문이나 문인들과 자주 강회를 열어 성리학과 예학을 강론함으로서 기정진의 주리론이 널리 보급되고 위정척사의 주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또한 기정진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답문류편(答問類編)󰡕을 편찬하였으며, 1901년 기정진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중간했을 때에도 단성의 신안정사에서 직접 일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 이후 기정진의 논설인 「외필(猥筆)」이나 「납량사의(納凉私議)」등에 대해 영남지역의 노론이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이 이단으로 배격하였을 때, 정재규는 동문과 문인들에게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게 하였으며, 본인도 직접 논서를 지어 기정진의 주리론이 결코 주희나 이이의 학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재규는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에 서부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개화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이어 그는 1905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민심의 결집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문인들과 함께 190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충청도의 최익현과 전라도의 기우만과 함께 각지에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문인들을 유생들에게 파견하였다. 비록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의병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실패하였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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