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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30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 - 40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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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경상우도 학풍 속에서 趙性家(1824-1903)와 崔琡民(1837-1905)의 활동을 분석하여 노사학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19세기에 새로운 성관집단이 성장하면서 학파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각 가문에서는 과거 급제나 학행에 뛰어난 인물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진주 일대의 학문 수준은 그 이전시기보다 훨씬 높아지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각 가문에서는 書齋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지리산과 덕천강의 풍경이 뛰어난 곳에는 樓亭을 지어 문장을 통해 당색을 뛰어넘어 교제하였다. 문장 외에도 경학이나 성리학에 뜻을 둔 학자들은 호남의 기정진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경상우도의 기정진의 문인들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따라 이어진 길을 따라 호남으로 나아갔는데, 곳곳에 숙박할 수 있는 객점과 시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족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여행이 용이하였다. 또한 장성의 김인후나 함양의 정여창의 후손 등 영,호남을 대표하는 사족들 간에 혼인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호남 지역을 왕래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정진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학자들이 기정진을 찾아와서 수학하게 된 것이다. 조성가와 최숙민은 19세기에 성장한 가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경상우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그들은 河達弘(1809-1877)등에 의해 전개된 시단에 참여하여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장성의 기정진을 찾아가서 주리론에 바탕을 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조성가는 호남지역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달홍 이후 이 지역의 시단을 이끌었으며 영,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는 崔益鉉이나 宋秉璿, 李震相 등이 찾아올 정도로 명망이 높았으며, 관찰사나 목사 등 지방관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어 강규를 새롭게 정하거나 조식의 신도비의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최숙민은 남인 출신이지만 기정진에게 수학한 인물로서 이항로나 이진상의 문인들과도 교제하면서 기정진의 학설을 심즉리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한 이후 동문들과 강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조식을 숭상하여 山川齋에서 德山講約의 강규를 정하는 등 강학에 힘써 산청과 단성, 진주 일대에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은 기정진의 학설을 추종하여 매사에 천명 즉 천리를 구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도덕적 질서를 중시하고, 의리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체 행동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도에 어긋난다고 반발하여 직접 언문을 지어 단성의 吏民들을 효유하여 결국 단발령을 철회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성가와 최숙민은 각각 이 지역의 문단과 학계를 주도하면서 경상 우도 지역에 의리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의 학설이 굳게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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