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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26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363 - 403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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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함양에 있는 鄭汝昌을 모시는 남계서원은 명종대에 건립되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남게 된 영남우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명종 7년에 姜翼 등 함양 사림 몇몇이 함양군수의 협조를 얻어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고을 사림들의 반대, 흉년, 후임 수령들의 무관심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주변 고을 사림들의 도움, 함양과 연고가 있는 지방관들의 후원, 처음과는 다른 함양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 10년만인 명종 16년에 강당과 묘우를 완성하였다.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사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서원이 새로운 향촌기구로 지방 사림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계서원은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해 나갔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증, 구입, 內賜 등의 방법으로 많은 서적을 소장하였다. 그리고 춘추로 講信禮를 거행하고, 서당과 연결하여 교육하는 등 향촌의 교육과 교화에 깊게 간여하여 고을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남계서원이 조식의 학문적 영향권에 속해 있어, 北人 관료들의 성장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원과 관련 있는 사림들의 科擧와 官歷을 조사해보면 관직 경험자는 미미할 정도였다. 사림파들에게 재기의 터전이 되고, 중앙정계를 지배하게 된 기반이 된 것이 서원이었다는 개설서와 교과서 등에서의 설명에 의심이 가게 만들고 있다. 남계서원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리자 인근의 新溪書院과 함께 묶어 재건을 추진하였다. 신계서원의 盧禛과 강익의 위차 변경을 둘러싸고 함양 사림들이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위차의 다툼이 서인과 북인의 대립으로까지 비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신계서원이 예전처럼 독립해 나가고, 남계서원은 옛날 위치로 다시 돌아와 재건되었다. 북인계 성향을 보이던 남계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자구책으로 남인계 서원으로 바뀌어 갔다. 별묘를 세워 강익, 鄭蘊, 兪好仁을 모셨다가, 숙종대 남인정권에 힘입어 강익과 정온의 위패를 남계서원의 배향으로 올렸다. 하동 정씨들이 이인좌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이후, 남계서원은 경원장 제도를 채택하는 등 노론계 서원으로 기울어져갔다. 19세기에는 정여창 후손들이 별유사를 맡아 서원의 재정 운영과 건물 수리에 깊게 간여하고, 함양유림들과 협의 없이 묘정비를 세워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남계서원이 점차 문중서원화되어 가는 가운데, 문묘에 모셔져 있는 정여창의 사액서원이라 하여 대원군이 단행한 서원 철폐를 모면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 남계서원을 통하여 조선시대 서원은 양반 사림들의 교육기관으로, 당쟁의 여론 기구로, 서원 후손들의 문중 기구로 성격이 변모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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