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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한문교육학회 漢文敎育論集 漢文敎育硏究 제33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467 - 49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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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南公轍(1760~1840)의 문학관이 轉變의 과정을 거쳤다는 전제 아래 어떠한 변이 양상을 보이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남공철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관각 문인으로, 정조조에는 정조의 近臣으로 활동했고 순조조에는 정국 운영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남공철은 생애의 대부분을 관각문인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실용성이 강한 관각문자보다 순문예적인 작품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학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글도 적지 않게 남겼다. 그런데 그의 문학관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하기에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되는 견해들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남공철의 문학에 대한 언급을 두고 어떤 연구자들은 그것들을 병치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혹은 모순되는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서 그의 문학관을 체계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문학관을 타당하게 설명하고자 한 시도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이를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공철의 문학관이 轉變했을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남공철이 자신의 문학관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글은 ① 「與成校理大中論文章書」, ② 「與金國器載璉論文書」, ③ 「與沈穉敎象奎書」, ④ 「與朴山如南壽」, ⑤ 「答金國器載璉」 등이다. 필자는 먼저 이 글들이 지어진 시기를 고증하여 이 글들이 ①→②→④→③→⑤의 순서로 쓰여졌고 이 가운데 1784년, 남공철의 나이 25세에 지어진 ③이 그의 문학관 전변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글임을 밝혔다. 그리고 ③을 기준으로 ①과 ②는 문학관 전변 이전의 관점을 내세운 것이고 ④는 문학관 전변 도정에서 쓰여진 것이며 ③과 ⑤는 문학관 전변 이후에 쓰여졌음을 살폈다. 문학관 전변 이전 남공철은 다분히 보수적인 문학관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보수적 문학관은 가학의 영향 및 수학기 스승인 金純澤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수학기의 남공철은, 문장에 구현해야 할 道가 仁義를 기반으로 한 성인의 도이며, 文은 시대를 내려올수록 쇠미해진다는 貴古賤今의 보수적 문학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장에서의 법도의 유연성을 인식하여 通變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이 점이 그의 문학관 전변의 내재적인 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학기에 활발히 교유하던 박지원과 이덕무의 문학관, 특히 ‘古今에 대한 상대적 인식’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되는데, 이것이 곧 남공철 문학관 전변의 외재적 동인이라 할 수 있다. 문학관 변화 이후 남공철은, 道가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道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하고 지금의 道를 지금의 말[辭]로 충실히 재현하는 글을 지향하면서 時文의 가치를 제고하고 있다. 이렇게 전변한 문학관은 이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실제 그의 산문 창작 과정에도 문학관의 변화 양상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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