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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동양고전연구 제40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17 - 14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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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교육기관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지만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鄕校)는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언제 향교가 처음 설치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대략 고려 성종이나 인종 연간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신정권과 몽고 침입 기간 등 부실화된 향교가 고려 말 다시 부활되기 시작하였고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조선 건국이 이루어지며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활성화되기에 이른다. 일읍일교(一邑一校)의 기치 하에 향교는 군현 단위로 전국적인 설치가 이루어지지만 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성사된 것은 아니고 시차를 두고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보고에 의하면 현재 남한에 231곳, 북한에 93곳, 도합 324곳의 향교가 남아있다고 한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하고 있는 조선은 초창기부터 과거(科擧)와 연계하여 향교를 통한 인재양성을 표방하였고, 실제로 수령칠사(守令七事)에도 ‘학교흥(學校興)’ 조항을 넣어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상으로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로서 교화(敎化)적 의미가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처음에 교관의 파견이라든가 토지와 노비, 서책의 지급 등 보조를 통해 향교를 지원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경에 이르면 교관의 질적 저하라든가 서원의 남설 등과 관련 그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고 종내에는 군역을 회피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까지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양반 사족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향촌기구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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