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교육사상연구회 교육사상연구 교육사상연구 제30권 제1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47 - 72 (2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에서는 조선 고종대 만동묘(萬東廟)와 서원(書院)의 훼철(毁撤)을 둘러싸고 이를 추진한 측과 이에 반대한 세력들의 서원에 대한 공식적 담론들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정책 결정자들과 이해 당사자들의 서원 폐단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였다. 고종 즉위 직후 만동묘 훼철, 미사액서원 훼철, 사액서원 훼철의 순서로 서원 훼철이 진행되었다. 당시 서원 훼철의 공식적 이유는 서원에 향사하기에는 학문이나 충절이 부족한 이를 제향하는 사설(私設) 문제와 동일한 인물을 여러 곳에서 제향하는 첩설(疊設)이었다. 조선 정부는당시 서원을 사실상의 제향기구, 가묘화된 시설로 간주하였다. 이후 유림들의 훼철 반대에 부딪히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서원이 대민 피해를 준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한편 유림들은 개별적으로 특정 서원의 존치를 주장하거나, 서원 훼철이 서원 폐단 해소의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무시되었다. 서원 훼철 단행 이후, 유림들은 만동묘의 복원을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춘추의리(春秋義理) 의 회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추진하였다. 서원의 경우는 복설을 통한 유학의 신장, 사제 관계의 회복, 강학 활성화 등 교육적 이유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서원의 복설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 유지하였다. 정부 측에서는 서원의 실제 위상을 강학기구라기 보다는 여전히 제향기구라는 인식을 유지하였고, 유학 강학의 활성화는 서원과 무관하다는 인식, 그리고 가묘화나 문중화의 우려를 계속 표현하였다. 한편 1880년대 이후에는 서원 복설을 주장하는 측은 천주교와 동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원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임오군란을 전후하여 청의 사례를 모방하여, 국가에서 서원을 설립하고 여기에서 유학과 함께 근대적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방안을 정부 당국에서 논의하기도하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14)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