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al of current Saudi politics is to construct an alliance beyond the causes of Arab and Islamic political ideologies and to maintain the internal and regional hegemony of the Saudi royal family.
Israeli-Saudi friendly relations have continued since the Israeli attacks on and occupation of Sinai, the West Bank and Gaza Strip, and the Syrian Golan Heights, which occurred in June 1967. These Israel’s attacks resulted in 776~983 Israeli dead, 10,000~15,000 killed or missing Egyptians, 6,000 killed or missing Jordanians, and 2,500 dead Syrians. This event in June 1967 radically changed the regional political situation and was the decisive turning point that caused the main leadership of the Arab World to change from Egypt to Saudi Arabia. Subsequently, Saudi Arabia has gradually strengthened its influence in the region with its vast oil resources it has. Unexpectedly Prince Turki al-Faisal was born to the King of Saudi Arabia, Faisal, who ruled from November 1964 to March 1975. The prince later said, on May 26, 2014, that "the Arabs had ‘crossed the Rubicon’ and don’t want to fight Israel anymore ... Israel has atomic weapons. We all know that. It has means to deliver these weapons … in the air force, and perhaps even a missile delivery system. The Israeli navy has submarines that can launch these missiles. So the Arabs are not crazy. Instead of waging war with Israel, the Arabs are waging peace"(Eldar 2014, May 29). This is Saudi recurrent regional politics.
1952년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 쿠데타를 주도하여왕정을 붕괴시킨 뒤 ‘이집트공화국’을 창설하고, 역내로 영향력을 급속히확장하면서, 1958년 2월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연합 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이 사건은 이집트와 사우디관계의 극적인 전환점이었고, 사우디 역내정책의 목표는 나세르의 세속적인 공화국 창설 돌풍을 저지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위해서 1958년 2월 사우드왕(재위:1953-1964)은 시리아 정보부장 압델 하미드 알 사라지에게 190만 파운드의 뇌물을 제공함으로써‘아랍연합 공화국’을 창설 축하하기 위해 시리아를 방문 중인 나세르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 사건이 실패하면서, 아랍세계에서 나세르의 명성은더욱 고양되었다. 그런데 1961년 9월 사우드왕이 후원한 시리아 군부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시리아가 ‘아랍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다른 한편 나세르 역내 영향력 강화에 맞서서, 역내경쟁자였던 사우디왕가는 하심왕가(이라크와 요르단 통치)와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 이과정에서 사우드왕은 1957년 처음으로 바그다드로 이라크 왕 파이잘 2 세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1958년 7월 이라크 하심왕가가 군부쿠데타로 전복되면서, 파이잘 2세를 비롯한 주요 왕가 구성원 대부분이 참혹하게 살해되고, ‘이라크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사우드왕가와 하심왕가 사이의 관계 개선시도가 중단되었다. 4년 후인 1962년 이집트가 예멘해방운동을 후원하자, 사우드왕과 요르단 후세인왕은 같은 해 8월 30일알 타이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집트에 대항하는 사우드-하심가 협력 체제를 창출하였다.
소련이 후원하는 나세르 통치하의 이집트는 비동맹운동 ․ 범 아랍주의․ 세속주의 ․ 공화주의를 대표하였다. 대조적으로 미국이 후원하는 사우디는 이슬람 ․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정부와 전반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62년-1967년 6월까지 예멘 왕당파와 공화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은사우디와 이집트의 대리전이었다. 나세르는 1962년 1월부터 예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 9월 나세르가 지원한 ‘자유 장교단’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예멘 아랍공화국’이 창설되었다. 이후 나세르가후원하는 공화파정부군과 사우디-요르단이 후원하는 왕당파 반정부군사이에 예멘내전이 발발하였다.
1967년 7만 명 정도의 이집트군대가 예멘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제 예멘내전 판도를 결정할 정도의 군대를 보유한 이집트는 북예멘을 넘어서사우디 남서부에 일격을 가할 태세였다. 1967년 2월 나세르는 “필요하다면, 이집트는 앞으로 20년 동안 예멘에 머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1967년 6월 5일 갑자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한 결과 이집트가 대패하면서, 사우디는 예멘을 경유해서 가해지는 이집트의 사우디 공격과 점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 극적으로 벗어났다. 결국 이스라엘 공격 일주일이 지난 6월 12일까지, 이집트는 예멘으로부터 군대1만 5천명, 탱크 150대, 모든 중포병 부대를 철수하였다. 10월 10일까지이집트 군대가 예멘에서 전부 철수하였다. 이로써 보수적인 왕국을 대체하는 공화국창설이라는 돌풍을 몰고 왔던 나세르의 역내 영향력은 극적으로 소진되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이집트공격은 아랍대의를 내걸고 역내 정치변동을이끌던 나세르를 몰락시키고, 대신에 막대한 석유자원을 보유한 보수적인 사우디왕가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