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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71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91 - 22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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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간 자료의 부족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京山李漢鎭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삶의 주요 국면들을 중심으로 그의 문예활동의 면모를 보다 풍부하고유기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이한진의 생애에 대한 충분한 탐색이 전제되어야,향후 ‘李漢鎭編『靑丘永言』’과 그의 시가 작품의 이해에 깊이 있는 연구 시각이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한진은 당대 최고 명문가인 安東金氏가문과 혈연·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요인이 이한진의 교육과 교유관계의 범위를 결정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어린 시절 이한진은 외가에서 農巖·三淵의 洛論系학풍의 영향 아래 성리학을 배웠으며, 아울러 그의 스승인嘐嘐齋金用謙을 통해 음률을 익히고 외가에 내려오던 書法을 체득하면서 점차 그에 대한 명성을 얻어간 것으로 보인다. 청년 시절 이한진은 과거 공부를 통해 입신출세를 도모하는 한편, 실제 정치적으로도 老論의 黨論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이한진은 중·장년기에 김용겸을 통해 燕巖一派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풍류를 즐겼다.이들의 풍류 현장에서는 퉁소 연주와 가창이 어울린 이한진의 음악적 재능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한진은 60세에 모든 식솔들을 이끌고 경기도 永平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그는은거 이후에도 과거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노론의 당론에도 가담하고 있었다. 영평 은거 후에 朴齊家가 영평현령으로 부임하면서 주로 박제가와 교유하였으며, 여기에 成大中·成海應등의 문인들과 함께 永平과 鐵原일대의 승경지를 유람하여 풍류를 즐겼다. 1800년에 이한진은 正祖에게 그 능력을 인정을 받아 중용될 수 있었지만 급작스런 正祖의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이 무산되어 버렸다. 이후 이한진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은거지 영평에서 속세를 잊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續漁父詞와 시조 몇 수는 이 시기 이한진의 심리를 대변해준다. 이후 이한진은 繕工監監役官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정식 벼슬이 아닌 임시 직책이었으며, 이한진은 74세의 고령에다가 몸도 불편하였으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한진이 생애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바로 자신만의 歌集편찬이었다. ‘이한진편 『청구영언』’은 널리 전파할 목적 없이 자신이 죽기 전에 생애를 되돌아보고 함께 교유했던 인사들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음악생활을 정리하기 위한 歌集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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