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4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119 - 1,146 (2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다양한 新舊학문 수학과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雄姿를 지녔던 해공은 독립운동시기나 해방공간의 정부수립기에 거침없는 행동철학을 드러냈다. 때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때로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강렬한 반공주의자로 다양한 모습을 표출한 것이다. 독립운동 노선도 다양했다. 해공은 상해 임정의 수립을 선도하고 헌법을 기초하여 초기 임정의 기틀을 닦았다. 나아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상해로 부임시켜 임정의 분란을 잠재우고 지도력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승만의 돌연한 미국행으로 좌절되었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의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면서까지 큰 기대를 걸고 추진했던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계의 대립과 갈등만 증폭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정을 떠난 해공은 섬서성 군벌 호경익 부대를 거쳐 중국국민당 남경정부의 심계원에 근무하다 1932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면서 독립운동계로 돌아왔다. 독립운동계로 복귀한 해공의 행로는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에는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면, 복귀한 뒤에는 임정이 아닌 독립운동 정당, 그것도 임정과 대립하던 진보적인 독립운동 정당과 급진적인 좌파 청년 무장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 해공은 초기 우파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함께 좌파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겸비한 주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정당의 좌우합작 통일전선운동이 좌절되면서, 나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조선청년전위동맹이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해공은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해공은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이 아니라 중경 국민당 지역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으로 해공은 세력기반을 상실하였고, 또 독립운동계의 위상도 추락하여 외로운 시절을 맞이했던 것이다. 외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의 주객관적인 정세가 그를 도왔다. 특히 동경 유학시절부터 지기로 지내온 조소앙의 우의와 후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조소앙은 임정과 떨어져 있던 해공을 자신이 위원장으로 겸임하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하였고, 나아가 외무차장으로 추천하였다. 이렇게 해서 해공은 중경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1944년 4월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연합정부가 출범할 때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어 중심인물로 부상하면서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환국 직후 불과 한 달여 만에 전국적인 파괴력을 갖춘 계선조직으로 정치공작대를 키운 사실은 해공의 뛰어난 조직 수완과 탁월한 능력을 말해준다. 더욱이 정치공작대는 바로 임정의 활동 기반인 동시에 해공의 세력기반이었으니, 해방 정국에서 해공의 영향력을 상상할 수 있다. 국자 1, 2호 발표를 기폭제로 하는 임정 중심의 반탁운동의 전개는 해공이나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성가를 높이며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좌파세력은 임정 환국 전에 이미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산하의 지방 조직으로 각급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정국의 대세를 잡아가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망과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반탁운동으로 임정은 일순간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해공은 반탁 입장에서 찬탁으로 급선회한 좌파세력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 자신이 관여하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연안행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좋지 않았던 기억과 서로 상승작용하면서, 해공을 반공주의자로 만들어 갔다. 또한 반탁 쿠데타 과정에서 미군정의 현실적인 힘과 남한사회에 미치는 규정력을 새삼 깨달았다. 더욱이 임정의 정치공작대 해체 조치는 해공과 임정의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해공은 미소의 역학관계나 남북의 이념분쟁 등 주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임정의 자주독립 통일국가 건설노선은 이상이지 현실노선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에 지방순회 중이던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해방정국의 또 하나의 파란을 몰고 왔고,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반면에 해공은 이승만의 노선에 찬성함으로써 임정과 결별 수순을 밟기 시작하였다. 결국 해공은 정치공작대를 이끌고 1946년 6월 독촉으로 합류하면서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됨으로써 임정과 결별하였고, 이승만과 함께 우파진영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더 나아가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노선을 추진하여 1948년 5·10선거에 참여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2)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