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역사 여성과역사 제12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69 - 110 (4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연구의 목적은 당시 많은 여성들이 4월혁명 이후 어떤 방식으로 이 혁명을 계승하고, 무엇을 지향했는가 등을 살펴보기 위한 것에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여성운동을 이끌던 세력들이 4월혁명 이후 어떤 방향으로 여성 운동을 결정하고 나아가는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혁명 이후 여학생들과 여성들은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신생활운동은 이승만 사임 직후 학생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민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여학생들은 서울대 여학생회를 중심으로, 일반 여성들은 겨자씨회를 중심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생활운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단지 국산품 애용운동을 하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구호였다. 여성단체에서는 이와 달리 신생활운동을 정치운동으로 확대시켰다. 7.29 총선을 앞두고 전국의 여성단체들이 YWCA회관에 모여서 ‘축첩문제’ 해결에 주안점을 두고 국민운동을 전개시키고자 하였다. 축첩문제는 개화기이후부터 여성문제와 관련해서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1945년 이후 축첩문제는 공창제와 더불어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사회적인 악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 결과 1953년에는 간통쌍벌주의가 법제화되면서 축첩은 범죄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4월 혁명 직후 여성들은 4월 혁명 계승을 위해서 축첩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축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은 선거 참여를 강조하였다. 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여성단체에서는 여성 관료 기용에 중점을 두었으나 이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장면정권과 여성계에서는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장면정권에서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단체의 행보에 대한 불신, 여성의 허영과 사치로 인해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분위기의 확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여성들은 장면정권에 대해 큰 실망을 하고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적극적인 지지에 나섰다. 그러나 여성계에 돌아온 것은 여성단체의 해산이었다. 군사정권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더욱 중요시하며 여권을 후퇴시켰다. 예를 들어 서구근대교육을 받고 여권을 강조했던 프란체스카나 박마리아가 아닌 현모양처의 이상형으로서 육영수를 이미지화하면서 박정희는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해 냈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 여성들이 전쟁협력을 선택하면서 동원과 종속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군사정권의 협력이 또 다른 여성의 동원과 종속의 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여성계는 그 세계로 나아갔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5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