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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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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8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83 - 20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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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후기 불교정책의 기조와 승군僧軍 활용의 양상을 국가정책의 전개과정 속에서 개관하고, 임진왜란 때부터 제기된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 논의와 전개과정, 승군에 의한 남한산성 수축과 사찰 조영, 방어체제 정비를 위한 승군의 조직화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임명 등의 문제를 검토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변동기에 보여준 승군僧軍의 활약은 불교의 용인과 승역僧役의 제도적 운용이라는 정책 변화를 낳았다. 앞서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은 불교의 위상을 제고시키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승려 노동력의 공적 활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불교계 입장에서 큰 경제적 부담이기는 했지만 한편 승려 자격과 활동이 용인됨에 따라 불교의 인적 재생산과 존립이 가능해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승역의 제도적 운용은 전란 후 양인 노동력의 부족을 메꾸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서 국가의 부역 및 조세 정책과 연동되어 전개된 것이다. 조선후기 승군 제도의 운영과 승역의 확대는 인조대에 남한산성의 조영과 방비에 승군이 활용되고 벽암각성碧巖覺性이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면서 제도화되었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 때부터 서울의 보장처로서 주목되었고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1624년부터 1626년까지 축성이 이루어졌다. 이때 다수의 승군이 동원되었고 팔도도총섭의 주관 하에 성내 사찰에 승군이 상주하면서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후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과 승군 운용이 남한산성을 모델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남한산성의 승군제는 승군 활용과 승려 자격의 용인이라고 하는 조선후기 불교정책이 제도화된 기점이었고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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