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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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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85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49 - 275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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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에 설치된 장충단(奬忠壇)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공원으로 변형된 과정과 공원 내에 건립된 박문사(博文寺)를 고찰한 글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장졸(將卒)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설립한 장충단이 일제강점기에 장충단공원으로 변모되고, 또 그 공원에 박문사가 건립된 과정은 우리 문화유산의 훼손은 물론이고, 문화침탈에 의한 일제 식민통치를 보주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장충단은 1900년(광무 4) 고종의 명(命)으로 설립된 제향(祭享)의 장소였지만,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도식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모되었다. 설립 초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장충단이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20년 초였다. 일제강점기에 장충단이 공원으로 변화된 과정은 공원을 매개로 하는 일제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32년 10월 장충단공원 내에 이토(伊藤)를 추모하는 박문사가 건립되면서 장충단 본래의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대만(臺灣)의 임제호국선사(臨濟護國禪寺)를 모방하여 박문사를 건립하며 내선융화(內禪融和)를 강조했다. 박문사 건립은 조선인의 정신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원 내의 박문사는 사찰 본래의 기능보다는 장충단공원의 기능을 공유하며 사찰로서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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