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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01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69 - 10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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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1905) 進士 273명의 경우 1갑 3명, 2갑 120명, 3갑 150명이었다. 이 중 朝考授職者는 272명인데 翰林 64명과 中書 및 各部 所屬 117명 등 총 181명은 進士館에 입관하도록 강제되어 있었다. 진사관은 한림들로 하여금 經史 등 전통학문을 공부하게 하던 翰林院 庶常館과 유사하였지만, 서상관과 달리 이들 한림 외에 部屬과 中書도 입관해야 하고 근대 학문을 공부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달랐다. 진사관에 대한 癸卯, 甲辰 진사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지만, 이러한 시각은 淸朝가 시행한 각종 정책을 부정적으로 보는 革命史觀에 매몰된 결과일수도 있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따라서 일부 進士들의 진사관에 대한 좋지 않은 回顧에 기대어 진사관에 대한 癸卯, 甲辰 진사 전체의 평판으로 일반화는 것은 무리이다. 보다 공정한 평가는 진사관 입관률과 같은 보다 객관적 통계에 의지할 때 가능하다. 진사관 2기 입관 대상자는 갑진 진사 272명 중 翰林 64명, 中書 및 部屬 117명 등 총 181명이었다. 이 중 약 107명이 입관하였다. 2기생은 이들 甲辰 진사 외에 癸卯 진사 등도 입관하여 총 150명 정도였다. 갑진 진사 입관 대상자 181명 중 107명이 입관한 것은 입관의 강제성에서 볼 때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입관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조항들에서 보면 그렇게 낮은 편도 아니었다. 따라서 갑진 진사의 진사관에 대한 평가 역시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9월 科擧 폐지는 進士를 입관자로 하는 진사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8월 淸朝는 진사관 2기생들을 대거 동경법정대학 속성과와 보수과로 유학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로써 비게 되는 공간과 교습을 다른 용도로 쓰고자 할 계획이었지만 정부 스스로 진사관 수업의 효과를 낮게 평가한 결과일 수도 있다. 1907년 9월경 유학을 떠날 당시 2기생의 규모는 甲辰 進士 최소 101명을 포함해 134명 정도였다. 그 즈음 일본에서는 재정 수입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 증대를 노리고 중국 유학생을 위한 각종 속성학교, 속성과정이 개설되었다. 1880년 2월 東京에서 개교한 東京法政大學도 그 하나였다. 科擧 폐지에 따른 정부 정책과 일본 유학 열기 등으로 2기생의 상당수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따분하면서도 많은 제약이 뒤따르는 진사관 생활이 아니라, 자유롭고 매력적인데다 이국적인 유학 생활을 國費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學部가 지급하는 학비 매년 400兩 외에 各省에서 주는 일본까지의 교통비 120兩은 물론 翰林․中書는 每年 津貼銀 240兩, 部屬 主事는 每年 160兩을 받았는데, 이는 장학금 수준을 뛰어넘는 봉급 수준이었다. 언어는 물론이고 낯선 이국 생활에 불편도 많았을 것이다. 또한 1년, 혹은 1년 6개월 만에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고, 과정 이수 후 귀국하여 學部 주관의 졸업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上位 職銜으로 장려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유학 생활이 반드시 즐거움으로 가득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육과정도 진사관 보다는 훨씬 철저하게 운영되었음에 분명하다. 淸末 진사 유학자는 구미 5명(卓寶謀 포함), 일본 176명, 총 181명이다. 총 181명 중 科次別로 103명의 갑진과, 대학별로 158명의 동경법정대학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주로 갑진 진사들로 구성된 진사관 2기의 대거 동경법정대학 유학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淸日戰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혁명 전의 중국의 상황이었다. 淸末 중국 사회 變化의 극적인 장면의 하나였다. 진사관 2기 내반생으로 동경법정대학 보수과에 유학한 진사와 同 속성과 이수 후 보수과에 진학한 진사들이 1906년 10월부터 시작된 1년 이수과정을 마치고 1907년 말 속속 귀국하였다. 그 6개월 여 후 속성과에 유학한 진사들도 1년 6개월의 이수과정을 마치고 속속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들의 행로에 대해서는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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