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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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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중국학보 제8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51 - 190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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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도시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남송 도성 임안의 민간신앙 전개양상을 검토해 보았다. 남송시기 도성 임안에는 전쟁과 사회경제적 유동성의 증가로, 서북피난민들과 함께 南遷한 ‘東京祠廟’와 남방 각지에서 유입된 ‘外郡行祠’들이 도처에 설립되면서 민간신앙의 새로운 지형이 형성되었다. 임안 고유의 토착신앙 외에 다양한 내원을 가진 지역신앙이 집결하면서 자연스레 민간신앙의 전국화가 이루어졌다. 남송정부는 현지인과 이주민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도성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각 집단의 지역성을 존중하고 후원해주는 유화적인 사묘정책을 견지하였다. 기본적으로 北宋 徽宗 建中靖國원년(1101)에 완성된 봉호와 묘액 하사를 통해서 지원과 통제를 병행하는 방식을 승계하였는데, 일단 正祠로 공인되면 立廟와 重修, 廟會活動 등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남송도성은 대체로 錢鏐가 건설했던 吳越 都城을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전통 도성이 천자가 기거하는 궁성을 중심에 두고 ‘坐北朝南’의 방향으로 건립되었지만, 임안은 ‘坐南朝北’의 북향도성이었다. 의례도시의 기준선이라 할 수 있는 중축선이 왜곡되었고, ‘左祖右社’와 같은 도성의 핵심의례시설 역시 실용적 차원에서 대칭구도를 무시하였다. 엄격한 장소규정이 이완되면서 의례도시의 定型性이 무너졌고 의례 본연의 신성함도 훼손이 불가피했다. 물론 공간적 제한이 이완되면서 민간 사묘가 도시내부로 확산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남송 도성 내 민간사묘의 공간분포와 확산 추이를 분석해 보면, 먼저 성황묘나 오자서묘와 같은 저명한 토착사묘나 무장권신들이 立廟를 주도했던 忠節祠들은 주로 중앙관서가 집중된 吳山 일대와 상업중심지에 위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忠節⋅士賢類와 같이 유교제사적 특징이 강한 사묘들은 자발적 분화나 확산과정은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서북이주민에 의해 臨安에 유입된 東京祠廟를 검토해 보았다. 神農氏를 醫神으로 받드는 皮場廟는 吳山 祖廟외에 萬松嶺과 侍郎橋巷, 元貞橋에도 行祠가 설립되었다. 이 일대가 宗室과 피난민들의 집거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피장신앙은 초기에는 서북 이주민 집단을 모태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侍郞橋에 설립된 行祠가 주목되는데, 인근에 惠民北局과 유명한 藥鋪들이 줄지어 있었다는 사실은 도시기능이 날로 분화하는 가운데 사묘도 관련 업종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도성주민들에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남중국 각지에서 유입된 外郡行祠도 도성 내외로 빠른 확산추세를 보여주었다. 동악묘는 도성 내에 만 5곳의 행사가 설립되었고, 오통신을 숭배하는 靈順廟 역시 도성내외에 총 7곳의 행사가 건립되었다. 外郡行祠는 이주민들이 집거하는 지역이나 고향과의 교류가 편리한 교통요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외군행사는 ‘고향의 신’께 당면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소망을 기구하는 신앙의 공간이자, 남중국 이주자들과 여타 도성 주민들이 새로운 유대관계를 만들어가고, ‘묘회’ 등 각종 종교행사를 통해서 서로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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