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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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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중국학보 제8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31 - 26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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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 중국의 정치·외교·학술 중심지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근대 고등교육의 실태와 한인유학생의 현황을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淸末民初 국립 북경대·북경사범대와 기독교계의 燕京大를 비롯한 관립·사립 학교들이 근대 학문·사상의 유입구 역할을 하였다. 19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 북경의 대학들은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거치면서 서구 신사조의 전시장이 되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군벌전쟁은 정치적 혼란과 교육 재정난을 악화시켰지만 제도적으로 대학설립이 수월해지면서 사립대학들이 난립하였다. 이 시기 중국학교들은 한인학생들에게 입학수속과 학비 등 여러 면에서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저렴한 생활비와 학비도 북경유학을 선택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1920년대 졸속으로 설립된 사립대학들의 허술한 학사운영도 한인학생의 입학을 도왔을 것으로 판단된다. 1920년대 이후 북경지역의 국립·사립대학들은 양적 성장에 뒤이어 질적으로도 빠르게 발전하였고 한인유학생들의 지적 성장에 좋은 여건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국민당의 훈정체제가 구체화되면서 교육계의 자율성이 제약받고, 만주사변으로 북경의 교육환경이 현저히 악화되면서 한인유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1937년까지 北京大, 燕京大, 民國大, 朝陽大, 平民大 등에서 한인학생들이 유학하였고 高級中學에도 다수가 공부하였다. 이 가운데 북경대에 한인유학생이 가장 많았고, 사립대는 민국대와 평민대에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나머지 대학에도 적지 않은 한인학생들이 재학하였다. 일제강점기 實名으로 확인된 북경의 한인유학생은 270여 명이고, 유학시기는 1920년대에 집중되었으며, 고급중학이나 大學豫科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의 전공은 다양했지만 인문사회계가 보편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사상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본경찰 및 영사관 등의 사찰문건과 신문·잡지의 보도를 통해 이름만 확인될 뿐 유학시기, 학교, 전공 등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인원이 일백여 명에 이른다. 한인유학생들이 학업을 끝마치지 못한 이유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거나 진로를 바꾸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침략기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한인청년들의 삶은 荊棘의 길로 근대지식의 습득과 학문적 성숙은 기대만큼 쉽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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