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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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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18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15 - 23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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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슬라프 1세에 이어 체코 위정자로 등극한 볼레슬라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이에른 하인리히 대공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미에스코 1세와의 연대유지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 당시 그는 이것을 통해 체코의 위상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즉위 초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2세와 대립했던 볼레슬라프 2세는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대공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에 따라 오토 2세와 전투를 펼쳐야 했고 결국 그에게 항복했다. 여기서 그는 현실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발적으로 오토 2세의 봉신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의 독립적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볼레슬라프 2세 및 그의 후계자들이 이전처럼 외교정책을 독자적으로 펼친데서 확인할 수 있다. 973년, 즉 볼레스라프 2세 때 프라하 주교청이 세워졌고 작센 코르베이 수도원 출신의 티트마르가 976년 프라하 주교청의 초대 주교로 취임했고 983년 6월 3일에 개혁적 성향의 보이테흐가 프라하 교구의 제 2대 주교로 취임했다. 주교로 취임한 직후부터 보에테흐는 교회의 위상증대 및 기독교 확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그는 성직자의 금욕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적개혁 역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볼레슬라프 2세는 이러한 보이테흐의 개혁시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향했던 ‘세속권이 교권을 우선한다’라는 원칙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보이테흐와 볼레슬라프 2세 사이에 잦은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양인 사이의 이러한 불화는 보이테흐 주교가 프르제미슬 왕가에 대해 적대적인 슬라브니크 가문출신이라는 데서 더욱 증폭되곤 했다. 결국 볼레슬라프 2세는 슬라브니크 가문을 단절시켰고 이러한 비보를 접한 보이테흐 주교는 프라하로의 귀환을 포기했다. 이후부터 그는 선교활동에 더욱 적극성을 보였지만 997년 4월 23일 프로이센 원주민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볼레슬라프 2세를 비롯한 프르제미슬 왕조의 위정자들은 일관된 외교정책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체코 영역도 제시했다. 그리고 이 왕조의 위정자들이 인접한 폴란드와 헝가리는 물론 강대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실정치의 중요성도 인지했는데 이것은 1848년 이후 체코 정치가들이 지속적으로 지향한 정책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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