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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혜영 (건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2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471 - 522 (52page)
DOI
10.31218/TRKH.2018.12.13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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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대 국회 전반 의회 내에서 전개된 여당 형성 활동을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주지하듯이 이승만은 정당 기반 없이 집권했고, 1951년 12월이 되어서야 자유당을 창당했다. 그런데 이때 자유당은 대중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된 ‘원외’ 자유당으로 신당운동에 참여했던 원내세력은 따로 ‘원내’ 자유당을 만들었다. 여당 형성 작업이 두 갈래로 나뉜것은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원외자유당은 대통령제 강화를 원했고 이를 위해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하지만 원내세력은 내각책임제 개헌이 목표였다. 즉 현 집권자인 이승만과 제휴해 여당을 형성하고 내각책임제 아래서 직접 정권을 담당하려 한 것이다.
원내자유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구상한 것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 때문이었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실정은 1951년 봄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민간인학살사건으로 절정에 달했고, 의회세력은 그 해결책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검토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1951년 5월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공화민정회를 조직했는데, 이들이 바로 원내자유당의 전신이었다. 신정동지회는 의회내 친이승만 세력이었고, 공화구락부는 정치적으로는 중립지대에 있었지만 정부실정에 대해서는 가장 비판적이었다.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가 통합한 것은 민국당을 견제하면서 원내 제1세력으로서 내각책임제 아래서 집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후원 아래 원외 이승만 세력과 통합해 여당을 형성하려는 이들의 구상은 개헌 문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특히 1952년 1월 직선제 개헌안이 의회에서 부결되고 이에 맞서 원외 이승만세력이 의원소환운동을 일으킨 것은 원내외 신당운동 세력이 결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더구나 원내자유당의 일부가 ‘합동파’를 형성해 원외자유당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원내자유당은 합동파와 ‘잔류파’로 분열했다. 결국 원내자유당의 잔류파는 민국당과 합세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한편 의회 선거를 통한 이승만 교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모두 실패했다.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성공했고 원내자유당은 해체 소멸했다. 하지만 이들의 내각책임제 개헌 구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1950년대 후반 야당운동의 구체적 목표이자 근거가 되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제2대 국회의 세력 편성과 공화민정회 구성
Ⅱ. 신당운동의 추진과 ‘원내자유당’ 결성
Ⅲ. 이승만과의 충돌과 ‘원내자유당’의 소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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