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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호태 (울산대)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91호
발행연도
2018.9
수록면
209 - 242 (34page)
DOI
10.37331/JKAH.2018.09.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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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천전리 각석에는 선사시대의 동물과 기하문, 역사시대의 세선각화와 명문이 새겨졌다. 각석에 새겨진 역사시대의 세선각화와 명문은 명소 방문의 기념으로 남은 흔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위에 그림과 글자를 새겨 남기는 행위는 신앙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천전리 각석은 신성한 바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525년(법흥왕 12년)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왕을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바위와 골짝에 이름을 지어주면서 서석, 서석곡은 왕경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 되었다. 불교가 공인되고 왕명으로 세워진 국가사찰 대왕사의 승려 안장이 이 바위를 찾아온 뒤 천전리 각석은 불교와도 관련된 신령스런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539년(법흥왕 26년) 왕자 심맥부지가 어머니 지몰시혜비, 할머니 부걸지비와 이곳에 다녀간 뒤 진흥왕으로 즉위하자 왕경의 귀족, 승려, 화랑이 잇달아 신령스런 바위를 찾아와 저들의 이름을 명문으로 남겼다. 화랑이 되면 반드시 찾는 곳처럼 여겨져 이곳을 찾은 수 많은 화랑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졌다.
기년과 인명, 관등이 명기된 6세기의 긴 명문들이 7세기부터 인명 중심의 짧은 글로 바뀌지만 통일신라가 쇠망의 기미를 보이는 9세기 후반까지 천전리 각석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그치지 않았다. 8세기 이후, 귀족이나 승려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 드물어져도 바위에 글자를 한두 자씩 새기거나 단순히 선을 그으며 소망을 비는 일반 백성 중심의 주술 행위는 계속되었다. 때로 용이나 새를 새기며 신령스런 힘을 받으려 애쓰는 일도 있었다. 이미 새겨진 명문 글자를 하나씩 쪼아 내 그 힘을 가져가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전리 각석이 지닌 신령스런 힘이 왕경의 귀족과 승려들에게 잊힌 이후에도 백성들의 바위신앙은 천년 이상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명문 판독과 해석
III. 명문과 바위 신앙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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