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尙奎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1집
발행연도
2018.8
수록면
281 - 311 (31page)
DOI
10.18496/kjhr.2018.08.61.28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고에서는 19세기 전반 趙寅永가문과 淸학자 간의 금석문 교류를 살펴보려고 한다. 조인영은 통상 안동김씨와 더불어 19세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를 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면모 이외에 그는 젊은 시절에 추사 金正喜, 청풍김씨 金敬淵과 교류하여 금석문 소양을 갖고 있었다. 조인영은 1816년 6촌형 趙鐘永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하여 청 劉喜海와 묵적 교류를 트게 되었다. 이후 조인영은 유희해에게 「해동금석존고」를 인편에 보냈고, 유희해는 그것에다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해동금석원」을 편찬하였다.
조인영의 금석문 취향에는 외부적 요소보다는 가문 내에 전수된 학문경향이 두드러진다. 조부 조엄이 1763~64년에 통신 정사로 가서 상당한 식견을 드러내는 사행록을 저술하였고, 부 조진관은 易學관계 저술을 남겼다. 자신은 중앙 정계의 핵심으로 있으면서 해마다 파견되는 부경사행 편에 금석문의 견해를 보내고 청나라 학자의 답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금석문 취향은 친구 김정희나 成大中, 趙秀三과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되었다.
조인영의 조카 趙秉龜는 1830년에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참여하여 청의 葉志詵에게 多胡碑를 선사하고 품평을 요청하였다. 다호비는 그의 조부 조엄이 1763~64년 통신 정사로 갔을 때 정사 서기 成大中이 에도의 문인서예가에게 질문 받은 것이었으나, 성대중은 당시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비첩은 뒷날 성대중과 詩會를 같이 하는 宋載道가 그 진가를 파악하였다. 조병구는 가문에 보관된 다호비를 청나라에 가지고 가서 섭지선의 스승 옹방강에게 전달하여 품평을 받았고 다시 그 품평은 4년 뒤에 김정희에게 보내졌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趙寅永의 학문 경향
3. 19세기 전반 趙寅永-趙秉龜와 淸학자 간의 금석학 교류
4. 맺음말
저술
ABSTRACT

참고문헌 (2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8-349-003406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