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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하희정 (감신대)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8호
발행연도
2018.3
수록면
183 - 215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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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농촌운동에 앞장섰던 김노득의 생애와 활동을 추적한다. 그는 1928년 감리교여자신학교에 입학했고, 1931년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과 함께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했다. 농촌지도과 교수 황애덕이 이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김노득은 대중문학을 통해 ‘인간 상록수’로 재탄생한 최용신의 후광에 가려 역사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농촌운동은 3 · 1운동 후 기독교 지식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회운동 중 하나였다. 국내 항일운동 네트워크는 붕괴되고, 10년간 지속된 일제의 경제수탈정책으로 민족생존의 터전마저 위태해진 상황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편승하고자 꺼내든 일본 식민정부의 ‘문화통치’도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국제사회의 다양한 흐름들이 빠르게 유입되었다. 그러나 국내로 유입된 사상들은 선택지가 줄어든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홍수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관념적 잉여재로 소비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깊어질수록 식민지 지성들의 고뇌도 현실이 아닌 관념으로 빠져들었다.
김노득은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농촌운동의 기수로 이름을 올렸던 대부분의 농촌운동가들과 달리, 수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대적 상황에서도 조용히 대중밀착형 농촌운동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한 현장운동가였다. 과감하게 현장을 찾았고 최용신 · 황애덕과 손잡고 당대 지식인들을 가둔 창백한 관념성에 균열을 냈다. 일제에 의한 강제몰수가 진행될 때까지 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실천하는 지성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김노득의 중요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성장과정과 농촌운동의 성과는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와 모순뿐 아니라 기독교 여성들이 실천하는 지성적 연대를 어떻게 구축했는지 보여준다. 특히 김노득이 일궈낸 성과는 YWCA나 교회여성들의 기독교 네트워크와 러시아 혁명에 뿌리를 둔 브나로드운동을 적절히 연결시켜 농민들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자립경제 구축과 의식개혁의 확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김노득의 성장과정
Ⅲ. 황해도 수안과 농촌운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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