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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홍길 (강릉원주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58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64 - 101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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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초기 운남에 남아 있던 원조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명조의 군사 행동에서 귀주 지역은 그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이 확실히 인식되어 위소의 군사기지가 그 교통로를 따라 설치되었다. 그 과정에서 토착민들의 저항투쟁이 계속 이어지자 그것을 진압하면서 위소가 증설되었고, 운남을 장악한 후에도 위소는 계속 유지되었다. 군사적인 지배에 머물던 귀주 지역이 일반 행정기구를 통한 지배로 본격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것은 영락제 시대인 1413년에 귀주성이 설치되면서 예하에 몇몇 행정기구를 갖추면서였다.
그러나 귀주성 행정기구의 실제 운용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본래 귀주는 원조의 지배하에서도 실제적으로는 여러 토착민 정권들이 자치를 하고 있던 곳이었는데, 명조가 이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협조적인 정권들에게는 원조의 전례를 이어받아 명조 지방 지배기구의 하위직을 구성하는 토사로서 임명하여 포섭하였다. 귀주에 성이 성립된 후에도 예하의 행정기구는 완비하지 않고 많은 지역은 그들 토사 지배기구에 맡겨놓았던 것이다. 그들 토사를 일소하고 명조의 직접 지배를 실현하는 것은 그 군사적·경제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애초에 엄두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사의 일에 개입하여 그 힘을 약화시키거나 그 지배지역을 축소시키고자 하였고, 때로는 아예 토사 기구를 철폐하고 일반 행정기구로 대체하는 개토귀류를 실행하기도 하였다.
반면 토착민 입장에서 볼 때는 기존의 질서와 관행으로 나름대로 살아오던 것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거나 방해받을 위협에 처하게 되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명조 권력이 진입하면서 세역의 부담도 늘어났다. 명조에서 토사로 임명받고 기득권을 계속 누리는 토관이라면 몰라도 토사 관할 구역이든 어느 관할도 받지 않는 생계(生界) 구역이든 토착민의 기층 지도자들은 명조에 대한 저항투쟁을 각지에서 전개하였다. 다만 명 초기에는 귀주에 아직 한족의 대량 이주가 행해지지 않아 그 저항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인자가 어느정도는 제한적이었다. 명 초기의 반란은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진 토착민 저항투쟁의 서막을 올린 셈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귀주성 설치의 배경
Ⅲ. 귀주 행정기구와 토사(土司)
Ⅳ. 토착민의 저항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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