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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란 (안동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28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271 - 30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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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大丘府戶籍大帳』의 기록에 의하면, 대구부의 동성마을은 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에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후반~20세기에 형성된 마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평민 동성마을로 규정할 수 있는 마을들이 포함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解北村廣里의 丹陽禹氏동성마을이다. 해북촌 광리에 형성된 단양 우씨 동성마을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특징들을 분석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해북촌 광리에 거주했던 단양 우씨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동성마을이 된 광리에서는 양반을 찾아 보기 어렵다. 광리는 본래 상층양반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고, 여러 姓貫을 가진 평민들이 거주한 전형적인 민촌이었다. 마을의 규모 역시 18세기 중반~19세기 후반까지 50~80호 정도를 유지한 작은 마을이었다. 中層職役者가 대다수였던 단양 우씨는 19세기 이후 마을 내의 다른 성관들에 앞서 上層職役으로 상승하였다. 직역상승을 통해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단양 우씨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동성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건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광리의 단양 우씨는 공통의 祖先에서 비롯된 단일한 계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평민 동성마을내의 구성원들은 혈연적 연관성이 없거나 또는 여러 계보에서 비롯되었다는 기존의 이해와는 상충된다. 광리의 단양 우씨는 오랜 기간에 걸친 世居로 혈연적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양반 동성마을은 유력성관이나 가문과 중첩적으로 통혼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평민층이었던 광리 단양 우씨의 통혼 양상은 일반적인 양반 동성마을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즉, 양반 동성마을처럼 특정 성관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혼인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양상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단양 우씨 배우자의 출신촌락 역시 특정 마을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평민 동성마을의 통혼양상은 양반마을의 그것과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광리 단양 우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듯이, 19세기 이후 동성마을의 형성주체는 양반 뿐 아니라 평민층으로까지 분화되었다. 평민 동성마을은 광리 단양 우씨의 경우처럼 구성원들 사이에 밀접한 혈연적 연관성을 가진 마을도 있었다. 이러한 평민 동성마을의 형성은 조선후기 친족질서 전반에 나타났던 일반민의 상층지향성이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평민 동성마을은 동일 성관의 血緣的集居라는 측면에서 외형적으로 양반 동성마을과 유사하였지만, 그 내부적인 구성은 다른 측면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丹陽 禹氏 同姓마을의 형성시기
Ⅱ. 인적 구성의 확대와 他 姓貫의 배제과정
Ⅲ. 同姓마을 구성원의 혈연적 연관성과 혼인관계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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