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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혜원 ((중국)칭화대학 건축학원)
저널정보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연구 아시아문화연구 제44집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125 - 15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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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기 지방의 대표적인 단유 건축은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성황단(城隍壇)이 있다. 이 중 성황단은 사직단이나 여단과 달리 문헌의 기록들이 혼란되게 나타난다. 이 논문은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분석하고,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성황의 혼란스러운 양상들을 정리하였다. 조선 초기 조선 정부는 새로운 제사제도에 맞추어 중앙에서 지내는 제사 뿐만 아니라 지방의 제사까지 사전을 정비하였다. 그 중 사직제와 여제의 경우 중앙 정부의 예제 정비가 무리없이 추진되었으나 성황제는 그렇지 못했다. 성황 제사는 전조인 고려 때부터 있어왔는데 여말 선초에는 매우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에 의해 추진되는 성황제는 이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어, 둘 사이에는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추진하는 성황제는 중국의 명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는 성황 위패를 모시고 거행되는 여제를 위해, 그 3일전 성황위패를 모셔가면서 성황단에서 거행하는 발고제이다. 반면 고려부터 이어오던 기존의 성황제는 상(像)을 모시고 사묘에서 진행하는 제사로 전통적인 기복 제사였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기존의 성황제사를 음사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혁파하려고 하였는데, 그 결과가 폐사설단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성황 제사는 민간 신앙으로서 그 생명력이 강했다. 그 결과 많은 지방에서 기존의 성황사를 복설하거나 환설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이 조선 후기 각종 지방 문헌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 초기 사직단, 여단, 성황의 설치시기와 그 주체
Ⅲ. 조선 초기 성황 제사에 대한 정치(整治)
Ⅳ. 성황의 폐사설단(廃祠設壇)
Ⅴ. 조선 후기 문헌에 나타나는 성황 제소의 혼란한 양상
Ⅵ.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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