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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진충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34號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7 - 31 (25page)
DOI
10.14769/jkaahe.2017.08.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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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 인조(仁祖) · 효종(孝宗) · 현종(顯宗) 연간에 활동한 사자관(寫字官) 설봉 김의신(雪峯 金義信, ?-1663 이후)과 그의 서예에 대한 것이다. 논문에서는 먼저 김의신의 생애와 관련해서 그의 가계를 밝히고 사자관 생활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선대 사자관 글씨와의 비교를 통해 김의신의 서풍을 살펴보았다.
김의신의 가문은 17세기 이후 화원을 비롯한 역관, 율관, 의관직 등을 세습해 나갔던 중인 가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김의신의 가계에서 사자관을 지낸 인물은 김의신과 두 아들 김이련(金以鍊), 김이석(金以錫)을 포함해서 총 7명이 있다.
김의신은 사자관으로서 약 4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국가 행사와 관련된 임시관서에 차출되어 다양한 서사 업무를 보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1637. 1) 때는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따라가 외교문서의 필사를 전담하였으며, 이후 가례도감(嘉禮都監), 녹훈도감(錄勳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존숭도감(尊崇都監), 책례도감(冊禮都監) 등의 도감과 찬수청(纂修廳)에서 일 한 기록이 전한다. 특히 1646년(인조 24) 녹훈도감에 차출되어 필사한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은 세로 89.2㎝, 가로 24m에 이르는 대작으로 김의신의 뛰어난 필사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김의신의 사자관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일로 1643년(인조 21), 1655년(효종 6) 연이은 두 번의 통신사행을 꼽을 수 있다. 사자관은 통신사행에 늘 동행했지만 김의신처럼 두 번 이상 통신사행에 참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1643년에 화원으로 동행한 김명국(金明國)의 〈수노인도〉에 쓴 화찬(畵贊)을 비롯하여 일본인의 요구에 의해 휘호한 것으로 여겨지는 편액서, 대자 해서, 초서 필적이 전한다.
김의신의 글씨는 대체로 한호의 서풍과 흡사하며 작품의 내용도 한호의 필적으로 전하는 것이 많다. 서체는 주로 해서(楷書), 행서(行書)가 많고 초서(草書)도 제법 전한다. 각체의 서풍은 석봉체를 깊이 배운 모습을 보이며 간혹 행서나 통신사행에서 구사한 초서 등에서는 보다 두터운 획법, 빠른 운필과 강하고 움직임이 많은 필세 등 본인만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김의신의 글씨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뛰어난 필력을 칭찬하기도 했지만 한호 이후의 사자관과 더불어 습기(習氣)를 면치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지적은 김의신이 사자관으로서 주로 실용적 서풍을 구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김의신은 비록 서예가로서 개성이 강한 서풍을 이루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김의신뿐 아니라 그 밖의 여느 사자관에게서도 찾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김의신 서풍의 의미는 당대를 대표하는 사자관으로서 왕실의 다양한 서사 업무에서 보인 빼어난 기량과 능숙한 필력으로 한호 이래 사자관 서풍의 전통을 잘 이어나간 모습에 있을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김의신의 家系와 寫字官 활동
Ⅲ. 김의신의 書風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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