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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9 - 54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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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안동 예안의 오천칠군자<SUB>烏川七君子</SUB>의 학문활동과 사상을 탐구한 글이다. 오천칠군자는 예안의 오천리 출신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일곱 명의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바로 김부필<SUB>金富弼</SUB> · 김부의<SUB>金富儀</SUB> · 김부인<SUB>金富仁</SUB> · 김부신<SUB>金富信</SUB> · 김부륜<SUB>金富倫</SUB> · 금응협<SUB>琴應夾</SUB> · 금응훈<SUB>琴應壎</SUB>이다. 이들 칠군자는 한 마을에 살면서 모두 이황의 문인들로 시문<SUB>詩文</SUB>을 강론하고 의리<SUB>義理</SUB>를 변론했다. 이황은 오천칠군자에게 이학<SUB>理學</SUB>과 예학<SUB>禮學</SUB>을 가르쳤다. 이황의 학문의 핵심어는 경<SUB>敬</SUB> 한 글자였다. 오천칠군자는 이황 문하에서의『심경心經』등의 강의를 통해 동정<SUB>動靜</SUB>을 통관<SUB>通貫</SUB>하는 경<SUB>敬</SUB>의 의미를 배웠다. 이황과 오천칠군자의 사제간은 스승 이황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사제간의 강론을 통한 실천적 덕성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오천칠군자는 벼슬에 나아가서는 명절<SUB>名節</SUB>로 이름이 났고 산림<SUB>山林</SUB>에 처해서는 예의<SUB>禮義</SUB>를 숭상하고 행의<SUB>行誼</SUB>를 삼가했다. 오천칠군자의 정신은 지식 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였다. 오천칠군자는 예학에 있어서도 합리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하여 조선사회를 새로운 성리학의 예치사회로 나아가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오천칠군자의 사상은 그 후손들이 잘 이어나갔다. 김부인의 아들 김기는 1598년에 조목의 추천으로 도산서원 원장이 되어 『퇴계집』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또한 김시찬은 도산서원 건립 후 조선 후기까지 서원에 소장된 장서의 관리가 어려운 것을 보고 장서실을 만들고 그 이름을 광명실<SUB>光明室</SUB>이라고 하여 도산서원 장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요컨대 오천칠군자는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이학과 예학을 공부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형성하여, 조선 후기 퇴계학의 수호와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고 영남지역의 유교문화의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오천 광산김씨의 내력
3. 오천7군자의 학문활동과 사상
4. 사상의 전승 양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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