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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현정 (韓國敎員大學校)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8권 제2호
발행연도
2015.11
수록면
123 - 161 (39page)
DOI
10.17068/lhc.2015.11.1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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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기 왕실 및 사대부의 후원이 이루어진 사찰에는 민인의 시주도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왕실과 사대부가의 사찰 후원은 사격을 높이는 역할을 하여 그로 인해 일반 민인들의 후원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왕실의 인척으로 가장 가까운 사대부 외척 가문의 후원을 실증적으로 검토하여 후원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여흥 민문은 여주와 안성 지역의 사찰에 후원을 집중적으로 하였던 기록이 전하고 있어 이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하였다.
여흥 민문은 조선후기 사대부 명문가로서 가례 의절 등을 발간하여 가풍을 세우고 혼인과 학연으로 안동 김문 등과 연결되면서 당대 최고의 외척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성황을 계기로 대전 회덕에서 경기 여주지역으로 가문의 세거지를 서울 인근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여주 세거 당시 세종 영릉의 조포사로서 왕실 원찰의 명성을 지녔던 신륵사에 안동 김문과 함께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가문이 함께 여주 신륵사에 후원한 것은 기록상 총 2회로 그 지원 규모가 큰 사례가 살펴진다. 김수항과 민정중의 후원, 김이소와 민종현 등은 당시 최고의 사대부 명문가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진 신륵사 후원이었다. 이후 여흥 민문이 쇠락할 시기에는 신륵사에 적극적 후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반면 안동 김문은 지속적으로 여주 신륵사에 적극적으로 후원한 기록이 살펴진다.
19세기 왕실의 외척으로 다시 등장한 여흥 민문은 안성 칠장사로 장지터를 옮긴 것을 계기로 이곳 사찰에 적극적으로 후원한 기록이 나타난다. 안동 김문의 독보적 후원이 이루어졌던 신륵사에 여흥 민문이 다시 후원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정계등장으로 최고의 세도를 누리던 민씨 척족들은 인목대비의 왕실 후원이 이루어져 원찰인 칠장사에 다시 적극 후원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왕실 외척의 사찰 후원을 보여주는 사례는 조선후기 사찰이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운영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목차

[초록]
1. 序論
2. 驪興 閔門의 形成과 成長
3. 驪興 閔門의 佛敎 後援
4. 王室 佛敎 後援의 特徵
5. 結語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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