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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주홍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19호
발행연도
2010.8
수록면
83 - 127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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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聖王(慶應, 839~857)은 興德王(秀宗, 826~836) 사후 3년에 걸쳐 벌어진 왕위쟁탈전의 결과 즉위하였다. 문성왕의 치세는 신라가 곧 와해되지 않고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던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문성왕대의 정국ㅇ르 통해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지, 어떠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신라하대 지배집단의 지향성을 해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성왕은 왕위쟁탈전의 결과 즉위하였기 때문에, 즉위 초 지지기반은 부친(神武王)을 지원한 공신세력 뿐으로 굉장히 협소하였다. 당시 정계에는 閔哀王 휘하의 세력을 비롯하여 다양한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할 여지가 컸다. 문성왕은 즉위 초 관직의 수여를 통해 공신세력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특히 張保皐를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숙부 誼靖을 시중으로 삼아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보고의 浮上은 지방세력의 성장이라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귀족세력의 재편성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귀족세력들의 불만을 초래할 수 있었다.
840년 12월 일본과의 교섭을 통해 독자적인 관계를 시도하는 등 장보고의 독자성이 강화됨에 따라, 문성왕은 왕권의 안정과 지방세력의 억제를 위해 귀족세력들과 연합하여 841년 11월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당시 신라조정은 청해진을 해체하거나 직접 관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武州 別駕 閻長을 통해 청해진을 운영하였다. 그의 직함은 신라관직체제 내의 것이므로 향상된 중앙의 통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세력의 정치적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신라조정의 求心點이 약해지면 그들이 독자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신라조정은 지방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지방세력에 의한 간접지배나 844년 穴口鎭 설치와 같은 직접지배방식을 다양하게 활용한 것 같다. 淸海鎭은 851년 혁파되고 碧骨郡으로 徙民되었다. 이것은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과 동시에 지방통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완전히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장보고 사후 문성왕에게 남은 문제는 지배집단의 재편성이었다. 문성왕은 841년 弘弼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압할 수 없었다. 그러나 847년 공신인 良順인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여 복주하였고, 849년 金式, 大昕이 반란을 일으키자 복주하고 昕?을 연좌하였다. 반란은 지배집단이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진압과정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성왕은 金陽, 의정, 啓明을 중심으로 지배집단을 재편하였고 김양이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문성왕은 847년 당 황제의 再?封을 활용하여 국왕과 왕태자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정국의 안정은 국왕의 절대적인 힘의 결과가 아니라 귀족세력들의 결속에 의한 것이었다. 憲安王이 문성왕의 遺詔에 따라 즉위하는 것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문성왕의 즉위배경과 정국구도
Ⅲ. 장보고 세력의 제거와 지방통제 강화
Ⅳ. 반란의 진압과 왕권의 안정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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