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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日圭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2호
발행연도
2011.8
수록면
175 - 21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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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렴은 국선이었다. 그는 산천을 돌아다니며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을 살폈다. 헌아왕은 응렴의 능력을 시험하며 내심 사위로 맞고자 하였다. 응렴의 부모와 형제는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한 탓에 헌안왕의 제안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범교사로 대표되는 응렴의 낭도들은 결혼하기를 절실히 바랐다. 결국 응렴은 ‘둘째 딸’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헌안왕은 화랑의 요구대로‘첫째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응렴은 헌안왕의 사위로 즉위하였다.
헌안왕과 응렴의 아버지 계명은 충공계나 박씨 세력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원성왕대 이후에 박씨 세력은 인겸과 애장왕, 충공, 흥덕왕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헌덕왕의 즉위 이후 박씨 세력과 충공은 인겸계 후손은 물론 예영계 후손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흥덕왕 사후 치열한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지자 충공계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분열한 것처럼 박씨 세력도 分枝化하였다. 특히 균정과 결혼한 박씨 세력은 그의 손자 문성왕과 연속적으로 혼인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나아가 신무왕이 장보고의 도움으로 즉위하면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장보고 선단의 기반인 서남해안 일대로 옮겨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문성왕대에 중앙의 박씨 세력은 감양이나 양순 등의 견제를 받아 점차 주도권을 잃어 갔다. 이들은 다시 충공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김양 세력을 축출해 나갔다. 그것은 헌안왕과 경문왕의 아버지 계명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문성왕은 서남해안 일대 박씨 세력을 위무하고자 하였다. 헌안왕 역시 이러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헌안왕은 여론을 등에 업고 왕비와 신하의 이해를 얻어 응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경문왕은 즉위 초에 문성왕과 헌안왕처럼 서남해안 일대에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그곳의 박씨 세력을 아우르려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서남해안 일대의 사찰에 불사를 설행하였다. 그 뒤 친동생인 위홍을 중심으로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친족과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는 서남해안 일대의 박씨 세력은 물론 경주의 박씨 세력을 한데 아우르려고 하였다. 특히 도당유학한 박씨 세력을 측근 세력으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씨 세력은 혈연적인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역을 확대해 갔다. 특히 경문왕 사후에 아들 헌강왕이 박씨 세력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는 주요 정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마침내 경문왕계 왕실의 마지막 혈손인 효공왕 이후 박씨 세력은 신라의 왕위를 차지하였다. 경문왕의 즉위와 경문왕계 왕실의 활동은 박씨 세력의 재건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응렴의 결혼과 즉위 이야기
Ⅲ. 결혼 전 정치세력의 동향
Ⅳ. 결혼의 정치적 의미
Ⅴ.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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