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저널정보
나혜석학회 나혜석연구 나혜석연구 제2권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74 - 111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긴 인물들의 경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부분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남녀의 구별, 신분의 차별, 삶의 방향이나 의지 등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의외의 것에서 ‘다름’이 어울려 ‘공감’을 형성하는 관계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혜석과 최린의 ‘스캔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후반부터 1928년 초까지 ‘자유의 도시’ 파리를 중심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나혜석의 ‘불륜’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정작 ‘스캔들’의 당사자였던 최린의 구체적인 대응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글에도 나혜석을 언급하지 않았다. 남편이었던 김우영도 나혜석의 이름조차 거론한 적이 없었다. 위자료 청구소송을 통해 최린의 ‘정조유린’ 및 ‘책임회피’가 나혜석이 이혼한 직접적인 이유로 드러났지만, 이 문제는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단순한 남녀 간의 일시적인 ‘스캔들’의 하나이며, 이미 나혜석의 이혼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보았을 수도 있다.
나혜석은 위자료 청구소송 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이후 발표한 글에서 최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묘사했다. 다만 최린도 같은 감정이었는지, 있었다면 파리에서 만 일시적이었는지, 귀국 후에도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이었지만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사회적 ‘비난’과 ‘책임’을 떠안았고, 이혼과 소송사건을 겪으면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와 달리 최린은 이후에도 종교·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명망을 유지하다가 중추원 참의를 맡으면서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나갔다. 정도는 다르지만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큰오빠 나홍석도 마찬가지였다. 나혜석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름대로 지조를 지키면서 글을 통해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분노, 저항을 표현하였다.
‘인간’으로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이를 동등하게 나눌 수 있는 남성과의 ‘사랑’을 인정하는 사회가 나혜석이 추구한 삶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사람을 매개로 관련된 인물의 행적, 특히 ‘스캔들’의 실제 공간인 유럽 현지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의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풍부한 연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만남 이전의 나혜석과 최린
3. 나혜석의 ‘세계여행’과 파리
4. 최린의 ‘구미시찰’과 친일 노선
5. 파리의 만남, 두 갈래의 운명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650-003439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