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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금표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남아시아연구 남아시아연구 제15권 제2호
발행연도
2009.10
수록면
133 - 16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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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독립 이후 시크들이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하고 칼리스탄 독립 운동을 하게 된 과정, 펀잡에서 아칼리 달과 빈드란왈레 그리고 국민회의(I)당이 대립함으로써 파생된 문제들 그리고 칼리스탄 운동의 성격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독립 후 인도인이 된 시크들은 주재편성 과정에서 펀잡어 사용지역을 독립 주로 편성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20년이 걸렸다. 또한 1966년 펀잡주가 독립되었지만 펀잡에서 시크교 정당인 아칼리 달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는데, 시크의 일부에서는 그 요인을 정부의 종교적 차별 탓으로 돌렸다.
전국 정당인 국민회의(I)당은 펀잡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펀잡의 지역 정당인 아칼리 달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부각시켰고, 이 시기에 빈드란왈레가 성장함으로써, 펀잡에서는 국민회의(I)당과 빈드란왈레 그리고 아칼리 달의 삼각관계가 미묘하게 전개 되었다.
인디라 간디와 국민회의(I)당은 빈드란왈레를 지지함으로써 시크 공동체의 갈등을 일으키는데 성공하고 펀잡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빈드란왈레는 시크 근본주의 혹은 부흥주의를 일으키며, 중앙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빈드란왈레에 동조하는 세력이 확대되자 어설프게나마 아칼리 달도 이에 동승함으로써 펀잡에서는 세속국가와 종교근본주의가 충돌하는 양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시크들 가운데 더 이상 인도인이 아닌 칼리스탄인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시크들의 이러한 욕구가 증폭된 것은 첫째로 독립 이후 시크들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누적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무슬림들은 종교 국가인 파키스탄을 얻었는데, 시크는 종교적 자율성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정치인들에 의해 확산되었으며, 셋째로는 힌두 근본주의가 성장하여 종교근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던 시대적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칼리스탄 운동을 일으킨 시크들이 인도와 분리된 완전 독립의 칼리스탄을 추구했는가에 대하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파키스탄 수준의 완전 독립을 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도 내에서 시크에게 적절한 종교적 대우를 촉구했거나, 인도가 힌두 국가로 향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시크들은 320만 평방미터의 땅과 11억의 인구를 가진 인도인이 될 것인가. 5천 평방미터의 땅과 2천 4백만의 인구를 가진 작은 펀잡의 칼리스탄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힌두뜨와 운동과 같은 힌두국가 건설의 열기는 인도인이라는 정체성(pan-Indian identities)을 약화시켜 분리주의가 더욱 강성해질 가능성이 있다. 종교와 지역을 넘어서 인도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분리주의라는 난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다.

목차

국문요약
Ⅰ. 서론
Ⅱ. 시크와 인도인
Ⅲ. 펀잡의 삼각관계와 Khalistan 독립 운동
Ⅳ. Khalistan과 인도의 분리주의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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