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南英珠 (경일대학교)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22輯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339 - 370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산동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琅邪는 춘추전국시대 각 국가들이 각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행정조직의 변동을 겪었다. 춘추시대 ?國의 封域에 속했던 琅邪는 춘추시대 마지막 覇主인 越王 句踐이 이곳으로 都邑을 정했다. 이후 ?國이 楚國에 의해 망한 후에는 齊國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琅邪가 남쪽에 위치한 越ㆍ楚國과 같은 강대국들 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춘추전국시대 琅邪의 행정조직의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지역의 특성과 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본 연구는 琅邪地域의 개념과 범위를 설정하였다. 秦漢시기 琅邪에서는 齊 지역의 고유한 祭儀인 四時祭가 국가제의로 통합되어 皇帝들의 巡幸 때마다 거행되었다. 또한 漢代에는 琅邪郡을 중심으로 家學과 經學世家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위진남북조시기 문벌귀족이 형성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전통을 포함하는 지역범위로 琅邪地域을 설정하였는데, 秦漢시기 琅邪郡(國)의 영역이다.
춘추시대 말에 이르러 ?國에 속했던 낭야지역은 越國과 吳國이 북상하여 齊國을 침공할 때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 때 山東半島 東南端에 위치한 작은 邑이었던 琅邪는 齊國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후 越國이 남쪽으로 물러난 후 낭야지역은 齊國에 속하였는데, 이때에는 齊國의 정권을 탈취한 田常의 封邑에 속하였다. 田常이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경제적 조건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인데, 낭야지역은 齊國의 동남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사실은 齊 지역에서 출토된 貨幣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낭야지역은 田齊 정권하에서 종교적으로 주목할 만했다. 琅邪가 齊國에 속한 후 齊 지역의 고유한 祭儀인 八神祭가 완성되었다. 八神祭는 齊國 각 지역의 제사를 국가의 祭儀로 통합한 것이다. 琅邪에서 행해진 四時祭는 팔신제의 마지막 제사로서 齊國의 영토가 완성된 것을 기념하고 齊人들의 民意를 통합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또한 四時祭는 한 해의 시작과 풍요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제사이기도 했다.
위와 같이 낭야지역은 齊國에 포함된 후 田齊 정권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經濟ㆍ精神的으로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낭야지역의 특성은 이후 ‘琅邪文化’를 형성하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琅邪地域의 개념과 범위
3. 越國의 北上과 琅邪地域
4. 田常의 집권과 琅邪地域
5. 맺음말
【參考文獻】
〈中??抄?〉

참고문헌 (35)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001-000459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