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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승호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7
발행연도
2012.9
수록면
299 - 33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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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후반 고구려와 서진의 관계사는 그동안 관련 문헌사료의 부재로 인하여 그 실상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특히 양측의 교섭이 실재하였음을 말해주는 유물로서 3종의 「晉高句麗率善」인이 전하고 있으나 이것이 어떤 배경 속에서 고구려에 전해졌는지, 그리고 당시 서진과 고구려 간의 외교적 교섭은 어떠한 국제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본고는 이점을 해명하기 위해 「晉高句麗率善」인의 사료적 성격을 검토하고, 나아가 3세기 후반 고구려의 對서진 외교가 진행된 배경과 그 교섭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먼저 확인 가능한 「晉高句麗率善」銅印의 주요 출토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集安 지역 일대이며, 西晉이 外夷에게 사여한 인장 체계를 기준으로 볼 때 이들 인장의 국제적 등급은 「國王」印과 「歸義王侯」印에 다음가는 3등급 「率善」印에 해당한다. ?溝?의 설치를 통해 고구려의 대외교섭권이 왕권에 귀속되면서 3세기 후반까지 고구려의 대중교섭은 고구려 왕권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서진과 고구려의 교섭 또한 고구려 왕권과 서진 측의 직접적인 외교 교섭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양국의 관계 정립 속에서 이들 「率善」印도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三國志』 東夷傳에 보이는 韓과 倭의 對魏교섭기사를 살펴보면 당시의 인수 및 의책은 주로 曹魏와의 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던 東夷의 관료층들이 지녔던 것으로 이는 교섭 권한을 담보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晉高句麗率善」銅印은 고구려왕을 대신해 西晉 측과 외교 및 교역 등의 대중국 교섭을 담당하였던 고구려측 관료가 지녔던 인장일 가능성이 높다.
3세기 후반 서진의 동북방 정책에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히 모용선비의 세력 확장에 따라 동이교위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한편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가 일시 붕괴되자 고구려는 피난 온 부여의 유민을 북옥저 지역에 안치?보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286년에는 동이교위 하감의 주도로 부여의 복국이 이루어졌다. 이당시 고구려와 동이교위가 이처럼 동시적으로 부여에 대한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고구려가 서진과 외교적 관계를 맺은 시기는 동이교위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285년에서 멀지 않은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의 일차적 교섭 대상은 동이교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晉高句麗率善邑長」印?「晉高句麗率善佰長」印?「晉高句麗率善仟長」印 등의 銅印 유물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립된 자료로서 이는 비단 외교 뿐만이 아니라 교역 등 양측 사이에 진행된 교섭 전반에서 교섭 수행자의 징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晉高句麗率善」印의 사료적 검토
Ⅲ. 인수의 전달 과정과 사여 방식
Ⅳ. 西晉의 동북방 정책과 고구려의 對西晉 관계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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