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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성주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11.9
수록면
221 - 25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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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고려시대 여진의 침입 중 강원지역 침입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고려 건국기 지금의 만주지역의 여진인들은 발해와 거란의 투쟁으로 인해 점차 남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일대에서 여진의 침입이 많이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활동한 여진인들은 東女眞으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여 동해안 일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東女眞 海賊’들의 활동시기는 11세기로, 1005년(목종5)부터 발생하여 1097년(숙종 2)까지 총 33차례가 확인되었다. 계속된 이들의 침입에 東北界 연해지방의 성보에 사는 군사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1009년(현종 즉위년)에 戈船 75척을 만들어서 鎭溟口(지금의 북강원도 원산)에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의 수군 부대인 鎭溟都部署였다. 그리고 동해안 연안 일대에 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강원도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부산에 이르기까지 축성작업을 하였다. 문종대에는 동해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연해에 城堡와 農場을 만들어 해적 침공의 요충을 장악하였다는 기록이 이것을 뒷받침하여 준다. 또 고려에서 먼저 육로와 해로로 ‘동여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수군 배치와 축성 등은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국가적 대응이라는 측면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동여진 해적’들은 지금의 강원지역뿐만 慶州, 鬱陵島, 심지어는 일본의 쓰시마[對馬島] 및 규슈[九州] 일대까지 침입하였다. 1019년(현종 10) 일본을 침입하였을 때는 많은 일본인들을 약탈하여 돌아가다가 고려 水軍의 반격을 받았는데, 고려에서는 포로되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주기도 하였다. ‘동여진 해적’들이 이렇게 일본까지 침입하였던 것은 고려의 수군 배치와 築城이 효과를 거두어 점차 침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동여진 해적’은 고려의 효과적인 방어정책과 완안부의 여진통합책에 따라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금을 건국하게 된 여진족들은 몽고족이 성장하면서 많은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중 浦鮮萬奴가 세운 ‘東眞’이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편승하여 고려를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東眞兵들은 독자적으로 또는 몽고와 연합하기도 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고, 몽고에 완전히 복속된 뒤에는 麗蒙戰爭(1231~1270)기간에 고려의 동북지방, 지금의 강원지역 일대를 주로 침입하였다. 이들의 침입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몽고군이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또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東眞兵을 끌어들여 고려의 동북지방을 공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고려와 女眞과의 관계
3. 東女眞 海賊의 침구와 강원지역
4. 東眞兵의 침구와 강원지역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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