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시준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5집
발행연도
2010.4
수록면
373 - 406 (3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한국과 중국은 오랜 역사적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한국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한중간에는 긴밀한 유대와 우호관계가 형성되었다. 당시 맺어진 한중간의 교류와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가 중한문화협회이다.
중한문화협회는 1942년 10월 11일 重慶에서 성립되었다. 한국인들을 1910년 이후 만주를 비롯하여 중국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과정에서 중국인들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교류와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37년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중국국민당 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가게 되자, 한국독립운동 세력들도 중경으로 집결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의 독립지사들과 중국의 각계 인사들이 중한문화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중한문화협회의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과 중국의 입법원장이며 孫文의 아들인 孫科였다. 이들은 한중 인사들의 상호연락, 한중 양민족의 문화 연구와 교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중한문화협회의 결성을 발의하였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의 당 정 군을 비롯한 각계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성립 당시 참여한 인원은 약 400명이었고, 2년 후에는 회원의 수가 668명으로 늘어났다.
중한문화협회는 한중의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이사장은 손과, 부이사장은 김규식이 맡았다. 조직체제는 상무이사, 상무감사를 두었고, 실무는 비서장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업무를 추진하기 위하여 연락위원회, 연구위원회, 선전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成都ㆍ昆明ㆍ上海를 비롯하여 중국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茶會ㆍ講演會 등의 형식으로 자주 모임을 가졌다. 이를 통해 한중의 우호와 유대를 증진시키는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촉구하고 압력을 행사한 것이 대표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기관지로 『中韓會訊』, 『中韓文化』를 발행하였고,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韓文班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한중간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민간우호단체였고, 항일전쟁시기 한중의 우호를 상징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한국 측 인사들이 환국하면서,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 측에서 이를 계승하는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중한문화협회의 성립
3. 중한문화협회의 구성원과 조직
4. 중한문화협회의 활동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911-000495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