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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호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8집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71 - 10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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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重慶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2년부터 전후 한국에 대해 연합국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임시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러한 구상을 당시 임시정부는 ‘國際共同管理’라고 불렀다. 임시정부는 ‘국제공동관리’가 일제 패망 후 한국의 즉시 독립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1943년 2월 1일자 『大公報』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제공동관리안을 반박하고, 한국은 즉시 독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43년 3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이든 외상이 만나 한국을 국제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합의하였다는 내용을 확인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반대운동에 나섰다. 우선 국제공동관리안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을 강화하였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김규식이 성명을 발표하여 반대 의사를 재차 천명하였으며, 선전위원 엄항섭도 중국 신문에 장편의 글을 투고하여 반대 여론 확산에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국제공동관리안에 반대하는 한국인의 통일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943년 5월 10일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重慶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각자가 속한 정당과 단체에 따라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달랐지만, 자유한인대회에서는 이를 초월하여 한목소리로 국제공동관리 문제에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가운데 커다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1943년 7월 26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중국 최고지도자인 蔣介石과 면담한 것이었다. 이 면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개석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우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이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장개석이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면담에서 한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미국 주도의 국제공동관리안 대두
3.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4. 在中國自由韓人大會를 통한 반대운동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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