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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민영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5집
발행연도
2010.4
수록면
189 - 234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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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1907년 8월 망명한 이후 연해주에서 2년간 의병으로 활동했다. 그는 최고 지휘관인 전제익 아래에서 중간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이 거느리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 7일 연해주 포시에트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공하였다. 이때 국내로 진공한 연해주의병의 전체 규모는 1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안중근이 거느린 부대는 2백명 규모였다.
안중근 부대는 도강 직후인 7월 7일 두만강변 마을인 홍의동을 습격하여 일본군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부대는 이어 신아산으로 올라가 10일 그곳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안중근은 이 전투에서 다수의 일본군을 생포하였으나,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이들을 석방시켰다.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승리를 거둔 뒤 안중근 부대는 홍범도 의병부대와 연합하기 위해 함경남도 삼수를 향해 남하하였다. 하지만, 길목을 차단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7월 21일 벌어진 회령군 영산전투가 그것이다. 이 전투에는 안중근 부대 외에도 우덕순, 김영선 등이 거느리던 연해주의병 4백 명이 참전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1908년 8월 말 연해주로 귀환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1908년 여름 한 달 보름 동안 국내진공전을 전개하면서 모진고통을 당했다. 이에 그는 국가독립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결과 그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곧 안중근의 이등박문 처단의거는 우리 민족이 수행한 의병전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국외망명과 의병투신
3. 국내진공전략과 渡江義兵
4.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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