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필규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08.6
수록면
331 - 374 (4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한인 ‘집단부락’은 일제가 1930년대에 연변지역에서 ‘강제적 수단’을 통해 형성한 한인 집거구였다. 이는 일제가 대륙침략정책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일제는 재만한인들의 ‘비적들로부터의 신변안전’과 ‘자작농창정이라고 하는 경제적 자립’을 명목으로 집단부락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일제의 침략 논리 속에서 재만한인을 강제로 토지에 묶고, 항일무장투쟁세력과의 연계를 끊고자 하는 것이었다. 연변지역은 일찍이 한인사회가 발달한 곳이었다. 이로 인해 항일무장투쟁이 왕성하였고 이를 탄압하기 위해 군사적 목적이 강화된 특징을 지닌 집단부락이 설치되었다. 이같은 점에서 ‘안전농촌’과 차별성이 드러난다.
집단부락은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매년 세 차례에 걸쳐 모두 28개소에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고 조선인민회를 하층 단위로 하여 자위단을 설치하는 등 ‘자작자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집단부락은 조선총독부가 제시한 입지조건과 수용인원 선별과정을 거쳐 동양척식회사에 의해서 설치되었다. 3차에 걸쳐 설치된 집단부락은 제1ㆍ2차 설치기에 비교적 대규모로 추진된 반면, 제3차 설치기에 이르러 규모가 점차 작아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1936년 만선척식회사의 설립을 기점으로 다시 본격화된 집단부락의 설치는 해방시기까지 계속된 집단이민으로 이어졌고, 연변지역 한인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서 작용하였다.
각현에 설치된 집단부락은 각기 비슷한 구조와 운영상태를 보이고 있었으나, 각현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친일적인 민회조직을 바탕으로 연길ㆍ훈춘현 집단부락은 ‘조선총독부 부락’으로 불렸다. 화룡현은 항일무장투쟁세력과의 치열한 교전, 왕청현은 1937년 이후부터의 강제이주, 안도현은 계획적으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혹한 폭력을 당했던 집단부락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이러한 집단부락 정책의 폭력성과 침략성은 집단부락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구술자료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목차

1. 머리말
2. 韓人 ‘集團部落’의 설치와 구조
3. 한인 ‘집단부락’의 분포와 특징
4. ‘집단부락’의 통제적 생활상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911-000495133